1화. 고구마 맛탕
며칠 전 엄마가 고구마를 한가득 구웠다. 그 옆에는 전기밥솥으로 만든 맥반석 계란이 한가득 쌓여있어.. 마치 응답하라 시리즈 성덕선네 집에 온 것만 같았다.
엄마 우리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집 같아.
아항항. (오랜만에 엄마를 빵 터트렸다) 그냥 먹어.
근데 고구마를 왜 이렇게 많이 구웠어?
다 썩어가길래. 몇 개는 빼서 버렸어.
(문득 초등학생 때 엄마가 만들어주던 고구마 맛탕이 생각났다)
옛날에 엄마가 고구마 맛탕 만들어준 거 맛있었는데.
... 그냥 먹어.
그래서 썩지 못하고 남은 고구마를 이용하여 고구마 맛탕을 만들었다.
1. (싱싱하지 않은) 고구마를 준비한다.
사실은 고구마 맛탕을 만들기로 다짐하기 전까지 예전에 알던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떠올랐고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겠다 생각했다.
그는.. 우리와 비슷하게 사회에 의해서도 깎이고 벗겨지며 스스로도 사회에 맞추기 위해 여기저기 닳은 사람이다.
2. 감자칼을 이용해서 고구마 껍질을 벗겨낸다.
여러 해 전에 만난 그는 자신의 세계가 뚜렷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게 좋아 보였다.
(분명 나는 그의 일부만을 알았을 것이고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은 선별적일 테지만)
그는 많이 흔들렸음에도 되기 싫은 사람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 주장이 없는 사람. 또 사회가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곳임을 직시했다. 물러서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싸움이든 무시든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3. 고구마를 먹기 좋게 깍둑썰기한다. (또각또각 생고구마를 썰며 희열감을 느껴보자)
하지만 몇 년 전 그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그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사회와 타협하면서 자신을 많이 도려낸 것일지 다른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일지.. 달라졌다. 어딘가 풀이 죽어있었다. 실실거리는 웃음기조차 없는 체념.
예술계는 워낙 힘드니까. (지금은 안 힘들고?)
나는 예술적이지 못해. (예술적인 건 뭔데?)
돈이 없어. (장학금 알아보는 건 어때?)
학위를 따고 나서도 얼마 간은 돈을 못 벌어. (그럼.. 다른 일을 병행해야지.)
일 병행은 못하겠어. (...)
함께 만난 사람과 마주 앉은 나까지도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4. 깍둑썰기를 한 고구마를 물에 넣어 전분을 뺀다. (정확한 시간은 안 재봐서 모르겠지만.. 물이 약간 탁해질 때까지 두면 될 것 같다)
누구라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경험을 했더라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그가 특별하거나 이상한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비난할 수 없었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게 꽤 담백한 생각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체념.
5. 키친타올로 물기를 제거한다.
이후로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늘어놓았다. 가령 예술을 하려면 집안이 예술을 하거나 예술 관련 학교를 가야 하고 어려서부터 그런 환경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식. 자기 비난과 연민이 느껴졌다.
세상은 대여섯 가지의 틀로 사람을 옥죄었고 고정된 틀 밖에 나가는 일은 공포였다. 사회로부터 주변 사람으로부터 버려질 것이라는 공포. (그는 한때 잠적했었다)
6. 팬에 식용유를 넉넉히 두르고 고구마를 팬 안으로 던진다! (팬과 부딪히며 통통 울리는 고구마 소리에 약간의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미디어는 주류 사회만 좋아한다. 뉴미디어 유튜브 안에도 주류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가지지 못할 것을 비추고 그것을 비추는 데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가? 동경심? 기득권이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 차이를 강조하고 결핍을 드러내며 기득권의 돈과 힘과 자원을 나누지 않기 위한 분리 전략? 하지만 시간은 자원이 아닌가?)
7. 웍(wok)질하며 고구마가 타지 않게 익힌다.
인스타나 틱톡은 한 사람의 극히 일부나 왜곡된 모습을 실제처럼 느끼게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자신과 비교하며 위축되기 쉽다.
8. 조금 더 익힌다.
우울한 감정이나 자신을 못났다고 여기는 감정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 일쑤라서 쉽게 주변 사람에게 꺼내지 못한다.
9. 조금 더..!
세상에는 그를 해칠 수단이 너무 많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안위와 처지를 항상 주의 깊게 봐야 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는 스스로밖에 보지 못하게 되었다.
10. 다 익은 고구마의 기름기를 살짝 빼준다. (뜨거운 김도 식힐 겸)
뉴미디어는 세상의 다양한 존재를 비춘다. 그럼에도 그는 다양한 존재 다양한 세계를 보지 못했다. 스스로가 자신을 직시하지 못한 탓도 있을 거다. 못난 나의 모습까지 받아들여도 그만큼 괴로울까?
하지만 유튜브와 인스타와 틱톡과.. 인터넷 세상에서 살면서 자신의 못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나?
11. 꿀 4스푼 + 물 2스푼 + 고구마를 투입하고 당신이 원하는 고구마 맛탕 점성이 나오면 요리는 끝이다. (물 다음 꿀 순서로 넣고 약간 보글거리면 고구마를 투입하자. 고구마는 이미 익어서 오래 두면 탈 수 있다.)
자신의 바깥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옆에 있을 것.
12. 좋아하는 그릇에 옮겨 담기.
그러다가 내가 너무 힘들면 도망치기. 도망치다 그에게 잡히기도 하고 도망쳤다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
세상은 밀면 뚝하고 떨어지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둥근 원이라서.. 세상에 구원 못할 사람은 없음을 알기.
13. 고소함을 더하기 위해 깨를 뿌려준다. (검은 깨면 더 보기 좋다!)
그래서 고구마 맛탕은 그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