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그렇게 돌아다닌 점집이나 철학관에서 어느 누구도 내가 병원을 이렇게나 많이 가게 될 거라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돌팔이 점쟁이들.
그 해 여름이었다. 동생이 자다 깨다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리더니 간지러움을 참을 수가 없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 제발 잠 좀 자자. 시끄러워 죽겠네. 혼자 고통스러워할 것이지. 왜 나까지 잠 못 자게 고통을 주냐고."
인간은 이렇게나 이기적이다. 얼마 전 맹장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롭혔던 게 누구더라.
동생은 다음 날 병원을 다녀오더니 칸디다 질염이라고 했다. 그리고 산부인과 굴욕 의자 체험을 이야기해주었다. 다행히 여자 쌤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말과 함께.
여자는 30세 이상이 되면 국민건강보험 공단에서 자궁경부암 무료 검진을 해준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도 당당하게 산부인과에 가야 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나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몇몇 지인들에게 굴욕 의자에 대해 얘기를 듣고 나니 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다.
그 해에도 무료 검진 우편물이 집으로 왔지만 어차피 갈 것이 아니었기에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며칠 후,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찾아왔다. 밑이 가려워서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동생에게 말했더니 증상이 똑같다고 했다. 나는 동생을 원망했다.
"너한테 옮은 거 아냐?"
"의사가 이건 옮는 거 아니랬거든!"
"시기가 아무리 봐도 옮은 거 같은데?"
나는 원인을 찾기 위해 열심히 검색했다. 감기처럼 흔한 질병이라고 한다.
'감기처럼 흔하다고? 난 감기는 그렇게 달고 살아도 이런 미칠 듯한 가려움은 처음인데?'
또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면역력이 떨어질 때, 항생제 사용 등이 눈에 띄었다. 설마 맹장 수술 하나 하고 먹은 약 때문에?
그 외에도 이것저것 의심이 가는 부분은 많았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병원을 가야 하나 싶었다가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수도 있어, 하고 또 망설였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서도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를 했다. 예약이 되지 않고 직접 와서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를 하는데 여자 쌤은 지금 수술 중이라 언제가 될지 모른다 했다.
"남자 쌤이라도 괜찮으시겠어요?"
하는 걸 보니 대부분 나처럼 꺼려하긴 마찬가지인가 보다.
수업하러 가야 하는 시간은 다가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 쌤한테 진료를 받으려니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다음에 올게요, 하고 가기엔 가려움에 대한 예민한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햄릿보다 더 한 선택의 괴로움에 빠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웃기지 마, 진짜 죽인다 그러면 결국 이런 건 아무것도 아냐.'
"그냥 먼저 되는 쌤으로 해주세요."
하지만 대기실에 앉아서도 몇 번을 고민했다. 그냥 갈까? 오늘 하루 일 째고 여자 쌤을 기다릴까? 그러기엔 맹장 수술 때문에 이미 수업을 쨌던 터라 또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을 바꿔 자기 암시를 했다.
'야, 김가령! 오버하지 마. 남자가 아니라 의사야, 그냥 의사! 남자가 아니라 의사, 남자가 아니라 의사...'
조금 후 내 이름이 불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의사가 갑자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순간,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한 마음에 불쾌감이 치솟았다.
'아씨, 지금이라도 다시 나갈까?'
콧노래, 얼마든지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콧노래는 너무나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지금이라도 나가버릴까? 아니야 실례야, 나 같이 생각하는 환자들 그동안 수도 없이 왔었겠지.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도 없어. 어차피 여기까지 온 김에 끝내자.'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웠다.
굴욕 의자에 앉는 순간, 생각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다리 모양대로 걸쳐 끼우니 다리가 절로 쩍 벌어졌다. 하지만 체념했다. 난 그냥 환자다, 아니 고깃덩어리다.
잠시 후 차가운 금속이 들어와 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최대한 머릿속을 텅 비우려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다. 우주의 시점에서 지금은 점도 되지 않을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