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소무(蘇武)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하자만 이릉(李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이릉(李陵)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진정으로 존경하던 인물 이광(李廣)의 손자이다. 이광은 '중석몰촉(中石沒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부하들을 너무나 사랑한 덕장이었다. 그런데 관운이 너무 없었다. 흉노와의 전쟁에 수많은 공을 세웠던 이광 장군은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고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한 적이 있다. 이에 조정에서 참수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되었다. 전쟁에서 패전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평민 신분으로 낙향하여 활쏘기와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우북평 태수로 임명된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풀숩에 있는 호랑이를 향해 활을 쏘았는데, 실제로는 돌을 꿰뚫었다. 돌을 호랑이로 착각하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활을 쏘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중석몰촉(中石沒鏃)이다. '화살촉이 돌을 꿰뚫다'는 뜻이다. 다시 같은 거리에서 활을 당겼지만 화살은 돌을 뚫지 못하고 그냥 튕겨버렸다. 이렇듯 무장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관운은 지독히도 없었다. 한무제의 외척인 대장군 위청 휘하에서 많은 경계를 받는다. 한번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이광이 우회하여 본진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행군 중에 늪지대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흉노 선우를 잡는데 실패하다 군 지휘부에서 이광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게 된다. 이렇게 되자 부하들에게는 죄가 없다면서 스스로 칼을 빼어 목을 찔러 자결한다. 그런데 이광의 손자가 바로 이릉이었으니.
이릉은 기원전 99년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따라 흉노를 정벌하러 갈 때 보병 5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초기에는 여러 차례 빼어난 공을 세웄다. 하지만 흉노 지역 깊숙히 들어간 상태에서 아군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적지에서 수만 대군에 포위되어 악전고투를 하게 된다.
수만의 흉노군에 포위되어 수일 동안 싸웠으나, 아군의 구원 소식도 없고, 무기가 떨어지면서 중과부적으로 불가피하게 항복하고 만다. 이전까지 그렇게 이릉을 격찬하면서 한무제를 비롯한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포상 추천까지 할 정도였지만 막상 이릉의 항복 소식을 들은 무제는 이릉이 흉노에 투항한 뒤 흉노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잘못된 보고에 크게 노하며 그의 어머니와 처자식을 죽였다.
천하정복의 야망에 불타는 강성군주 한무제에게 이릉의 항복 소식은 치욕에 가까운 비극적인 사태였고, 오히려 이릉이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자진하는 것을 원할 정도였다. 이때 미천한 사관에 불과한 사마천(司馬遷)이 이릉을 옹호하다가 한무제의 격분을 초래하여 궁형(宮刑)을 당한다. 그 많은 대소신료들이 모두들 몸을 사리고 침묵을 지킬 때 사마천이 떨쳐 일어나 이릉을 변호하다 오히려 궁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를 흔히 '이릉의 화'라고 한다.
사마천이 평소에 알고 있는 이릉의 인품을 고려할 때 이릉이 자신의 부귀영화 욕심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투항한 것이라고 강력하게 변호하였지만 한무제는 오히려 치를 떨며 분노의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냈을 뿐이었다. 자신이 흉노에 항복한 뒤 어머니와 처자식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릉은 결국 선우의 회유를 받아들여 그의 공주와 결혼하고 벼슬까지 받게 된다.
항복 직후에는 조국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하여 훗날을 도모한다는 결의가 강했지만, 막상 한무제가 자신의 항복 후 가족을 모두 도륙내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국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결국 이릉은 조국 한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중앙아시아의 흉노 지역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자포자기식의 삶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릉이 항복하기 1년 전에 소무가 한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다. 한나라 출신으로 흉노에 먼저 투항하여 고위직에 있던 대신 위열을 저격하려는 흉노 내부의 음모가 들통나고 소무의 부하가 연루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물론 소무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사신단의 대표인 정사인 입장에서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책임을 맡은 위율의 회유가 들어온다. 함께 흉노왕 선우 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위율의 설득에 소무는 오히려 강력한 어조로 위율을 비판한다.
의지가 굳지 못하면 이러한 설득이나 회유 또는 협박에 단번에 넘어갈 상황이지만 소무는 달랐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뛰어난 인품을 지닌 소무를 자신의 휘하에 놓고 싶었던 흉노의 추장인 선우가 위율을 통해 회유와 협박을 섞어가며 소무의 마음을 바꾸려고 노력해 본다. 하지만 끝내 투항을 거부한 소무는 결국 북해(北海, 지금의 바이칼호)에 유폐되는데, 이때 흉노의 선우는 숫양이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면 소무를 풀어주겠다고 하였다. 숫양이 어찌 새끼를 낳을 것인가. 이건 소무를 한나라도 결코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북해로 보내기 전에 선우의 부하들은 소무를 토굴에 가두고 음식을 충분히 주지 않았다. 아니 거의 주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소무는 눈을 녹여 먹고 양털로 된 담요의 실을 씹으면서 아사지경에서 견뎌냈다. 흉노들이 소무를 다시 보게 된다. 북해에 유폐된 상태에서 허기에 져서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다. 들쥐가 모아 놓은 풀씨를 훔쳐 먹고, 들쥐마저 잡아먹으며 극한 상황을 이겨내게 된다.. 그렇게 버틴 19년 동안 소무는 한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 땅으로 파견되었을 때 사신의 표시였던 지절(持節)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조국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했고, 변절하지 않는 그 마음도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위율에 이어 이번에는 이릉의 설득이 이어졌다. 위율과 달리 이릉은 예전에 소무와 함께 조정에서 함께 출사하여 근무한 경험이 있는 만큼 소무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소무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이릉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릉은 위율과 달리 협박이나 회유보다 진심어린 설득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소무의 가족들이 사소한 잘못에 자결하거나 목숨을 잃는 등의 불우한 상황을 들어 흉노에 투항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상당히 현실적인 제안을 하지만 소무는 황제 폐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천하 정벌의 야망에 불타던 한무제가 죽고 뒤를 이어 소제(昭帝)가 등극하였다. 중국의 대흉노정책은 세월의 변화에 따라 화친정책으로 전환하였고, 한나라는 소무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흉노의 집권 세력은 소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전날 한나라 출신으로 흉노에 투항하여 고위직에 있던 위율! 그 위율을 저격하려는 음모에 휘말린 장승이 흉노에 투항한 적이 있다. 그 장승이 이번에는 한나라 사신에게 소무가 살아 있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자신은 조국을 버린 것이 참으로 부끄럽지만 소무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소무의 생존 소식 정보를 비밀리에 접한 한나라 사신은 한 가지 꾀를 낸다. 사신이 흉노 관리에게 "황제가 상림(上林)에서 사냥하던 중 기러기 한 마리를 얻었는데, 그 발에 매달린 비단에 소무가 어떤 소택지(沼澤地)에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라고 전한다. 이에 흉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소무를 한나라에 보내게 된다. 결국 소무는 풀려나고, 19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관내후(關內侯)가 봉해진다. 소무는 80세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힘을 기울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다. 죽어서는 황제의 누각인 기린각(麒麟閣)에 그의 초상이 걸리는 영광까지 누린다.
조정에서 함께 출사하여 소무와 이릉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이릉이 선우의 명령으로 소무를 설득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선우는 자네와 내가 친한 것을 알고 설득하여 꼭 데려오라며 나를 보냈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고생 그만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고 하지 않는가." 이슬과 같이 참으로 짧은 인생에 그 무슨 무의미한 충성심을 가져 무엇하랴는 이릉의 제안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더욱이 그렇게 충성을 다한 조국에서 이릉의 가족이 몰살당하고, 소무의 형제들을 사소한 임무 소홀올 황제에 대한 죄책감을 자살하였을 정도이니 낯선 땅 흉노에서 작록을 충분히 받고 인생을 향유할 수 있다는 현실이 왜 매력적이 않을까! 그러나 소무는 이번에도 강경한 어조로 이릉의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고 훗날 소무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 이릉은 시(詩)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손잡고 강가의 다리 위에 오르니 携手上河梁
나그네 황혼 무렵에 어디로 가는고 游子暮何之
길 가 배회하며 徘徊蹊路側
이별의 말도 못하니 한스럽기만 한데 恨恨不得辭
새벽바람은 북쪽 숲을 울리고 晨風鳴北林
반딧불은 동남으로 날아가는데 熠熠東南飛
뜬 구름에 해는 천리이니 浮雲日千里
어찌 나의 이 슬픔을 알겠는가, 安知我心悲
이 시에 대해 소무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쌍부(雙鳧)가 함께 북으로 날아와 雙鳧俱北飛
한 마리만 홀로 남으로 날아가네. 一鳧獨南翔
그대는 마땅히 이 객사에 머물고 子當留斯舘
나는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니 我當歸故鄕
먼 오랑캐 땅에서 한 번 헤어지니 一別如秦胡
만나볼 기약이 언제려나 會見何渠央
슬프다 절절한 이 마음 속에 愴恨切中懷
눈물이 옷깃 적시는 것도 알지 못했네. 不覺淚霑裳
소무가 조국 한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절개를 지킨 세월이 19년이다. 그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소무는 단 한 번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이릉인들 소무의 귀국에 상념이 없겠는가. 그의 시에서도 귀향 내지 귀국에 대한 열망이 가득 느껴진다. 비록 몸은 흉노 땅에 있지만 한나라 조정에서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주었으면 평소에 충성심이 가득한 이릉도 돌아올 마음이 없었을까. 한무제가 자신의 가족을 잔인하게 학살한 조국에 돌아올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처자식을 비롯한 가족 친척은 사라졌지만 인간 본연의 고향에 대한 향수마저 사라질 수 있겠는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더라도 자신의 원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릉 입장에서도 소무의 귀국을 보는 심정은 부러움 섞인 착잡함이 아니었을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소무의 19년 절개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관점이 나올 것이다. 긍정적 관점에서 부정적 관점까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긴 하겠지만, 소무가 그 긴 세월 동안 오직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며 고향에 돌아오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손바닥 뒤집기처럼 쉽게 변하는 요즘 세태의 인간관계에서 많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