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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Oct 18. 2022

간축객서(諫逐客書)

태산은 한 줌 흙도 사양하지 않는다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여 천하를 경영하는데 결정적으로 위기 국면을 기회로 만든 경우가 많다. 바로 진시황 시절 승상을 지낸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라에 들어와 있는 객들을 쫓아내지 말라는 상소문이다. 중국 고대 사회 명문장으로 꼽힌다. 진시황을 보좌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제국의 초석을 닦은 이사는 정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이사는 원래 초나라 상채군의 말단 관리 출신이다.      


사마천 『사기』「이사열전」에는 이사의 젊은 시절의 색다른 경험과 그에 따른 인생관의 정립 과정이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어느 날 아침 이사가 출근하는데, 오물이 가득한 뒷간에 사는 쥐가 사람이나 개가 다가가면 뭔가를 먹고 있다가도 놀라 황급히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반면에 쌀이 가득한 곳간에 사는 쥐는 이사가 다가가도 놀라지도 않고 여유롭게 쌀을 먹는 장면을 목격하고 탄식했다.     

     

“사람이 어질거나 어리석다고 하는 것도 쥐의 경우와 같아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人之賢不肖譬如鼠矣, 在所自處耳     


그리하여 이사는 순자(荀子)를 찾아가 제왕의 천하 통치학에 대해 공부하였다. 학업을 마치자 천하의 형세를 판단한다.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모색한 것이다. 초나라 왕은 섬기기에 부족하고 6국은 모두 약소하여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진나라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이사는 스승 순자의 슬하를 떠나면서 아래와 같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때를 얻으면 놓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고 유세객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진나라 왕은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천하를 통일하려고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선비가 바쁘게 일해야 할 때이며, 유세객으로서는 두 번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비천한 것보다 더한 부끄러움은 없으며 가난보다 더한 슬픔은 없습니다. 비천하고 가난한 처지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남의 출세를 미워하며, 스스로 고상하다고 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올바른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에서 일해보고자 합니다.”  

             

당시 이사는 타국 출신이었지만, 진나라는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인재들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여 국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국의 흐름을 판단하는데 비상했던 이사는 당시 진나라의 실권자인 여불위에게 발탁되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 매 사안마다 뛰어난 정책을 제시하여 여불위의 인정을 받게 된다. 이러한 공적으로 이사는 타국 출신으로 진왕 영정의 자문 역할을 담당하는 객경(客卿)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사는 여불위의 천거를 받아 진시황 앞에서 구체적인 천하 통일 전략을 제안한다. 이사가 진언한 계책은 일종의 이간책으로, 금은보화를 지닌 사람들을 각국으로 보내 유세와 매수, 뇌물과 이간으로 여섯 나라의 군신들을 흔든 뒤 각개 격파하자는 것이었다. 뇌물을 거부하면 자객을 보내 죽이거나 군대를 파견하여 공격한다. 여섯 나라를 하나씩 차례로 삼키면 통일대업은 큰 힘 들이지 않고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정은 이사의 책략을 받아들였고, 결국 그런 책략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기원전 237년 한나라 출신의 토목기술자 정국(鄭國)이 진나라의 국력을 소진시키고자 운하 건설을 계획한 사건이 일어난다. 진나라가 지속적으로 침략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소국 한나라는 특별한 계책을 낸다. 유명한 토목기술자를 진나라에 보내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그 공사에 국력을 쏟아 붓게 하여 진나라의 침략을 잠시 유보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 틈에 한나라는 한숨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는 그 토목공사의 부담 때문에 재정이 파탄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운하 건설이 진나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나라 측에서 설득한 후에 기술자를 파견한다. 결국 엄청난 물자가 드는 운하를 건설하도록 유도하여 진나라가 한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을 약화시키려 시도한 일이었다. 우리가 역사에서 대규모 토목공사 때문에 나라의 재정을 약화시켜 결국 망국의 지경에 이르는 사례도 많이 보았지 않은가. 운하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한나라의 의도가 결국 들통이 난다. 이 일로 진나라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 안팎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고, 이어 종실 귀족과 외국에서 들어온 객경 사이에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었다.  

   


           

진나라 출신의 대신들은 여불위, 이사 등 객경들에 대해 진작부터 원한을 품고 있었으나, 타국 출신의 실력자들을 등용하고 강력하게 후원하는 진시황 영정(嬴政)의 기세에 눌려 드러내 놓고 불만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일로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고, 진나라 출신의 조정 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외부에서 들어온 객경들을 내쫓을 것을 주장했다. 영정도 어쩔 수 없이 객경들을 내쫓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이에 이사는 중국 역사상 빼어난 문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간축객서」를 올린다.「간축객서」란 타국에서 온 인재들을 쫓아내는 축객에 대한 간언서를 뜻한다.    

            

그러므로 태산(泰山)은 작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거대해질 수 있었고, 하해(河海)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기에 그처럼 깊어질 수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왕은 백성들을 물리치지 않기에 그 덕을 밝힐 수 있사옵니다.          

        

 是以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 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 王者不卻眾庶, 故能明其德.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이 문장이 이사의 최초 창작물이 아니라 제나라 관중의 『관자』라는 책에 먼저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사의 간언에서 최고의 명문장으로 일약 유명해진다. 축객령에 따라 추방령을 받은 이사가 수도 함양을 떠나면서 「간축객서」를 올린다.「간축객서」는 중국 역대 산문 가운데서도 명문장으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이며, 왕에게 올리는 건의를 담은 서간문 형식을 한 상서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간축객서에 들어 있는 대강의 내용이다.      

         


이사는 먼저 출신지에 상관없이 천하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춘추 5패 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목공(穆公)을 언급했다. 그리고 목공을 이어 제위에 오른 역대 진나라 선왕들의 뛰어난 인재 등용 방식을 들어 진시황을 설득했다. 그렇게 국적을 불문하고 등용했던 타국 출신 관리들이 모두 진나라의 발전에 막대한 공헌을 했으며, 이들을 발탁하지 않았다면 진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진나라 왕의 현실생활을 예로 들어 진나라 왕의 주변에 있는 보물이나 준마, 미인, 음악 등은 모두 타국에서 바친 것인데, 진나라 왕이 그런 것들은 국적을 따지지 않고 즐겨 받아들이면서, 정작 중요한 인재 등용의 문제에서는 경솔하게 타국 국적의 관료를 배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오직 그의 재주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하고, 동방 육국(六國)의 인재를 이용하여 진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했다.   

 

        

영정은 이사의「간축객서」를 읽은 뒤 축객령을 즉시 취소하고 다시 이사를 중용하여 정위(廷尉)로 발탁하게 된다. 이사는 진시황을 보좌하여 천하 통일을 이룬 뒤,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천하의 대혼란을 야기했던 주나라의 봉건제를 버리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여, 중앙정부가 전국을 일사불란하게 관리하는 군현제를 실시한다. 진나라 왕 영정은 황제라는 칭호를 받아 진나라, 중국 최초의 황제인 시황제가 된다. 이렇게 천하의 명문장「간축객서」를 통해 진시황을 설득하고 나아가 이사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직접 대면하여 간언을 한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것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 승상의 지위로 진시황을 보좌하면서 천하를 경영하여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던 이사의 인생 말년은 참으로 비참하게 끝난다. BC 210년에 진시황이 순행 도중에 사구에서 사망하였고,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는 유서를 위조하여 진시황의 장자이자 태자였던 부소에게 자결을 명하여 죽게 만든다. 조야의 신망이 두텁고 백성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장자 부소가 제위에 오르면 자신들의 권력도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 이들이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하면서까지 장자 부소가 아닌 막내 아들 호해를 제위에 올린다. 태자 부소를 제거하면서 너무나도 무능한 호해를 제위에 올려 자신들의 권력을 탄탄하게 구축했다고 확신했지만, 진시황 사후 불과 15년 만에 중국 최초 통일제국 진나라가 급속도로 붕괴하고 말았으니. 



부소와 함께 북방 국경을 지키던 걸출한 장수 몽염도 함께 체포하여 제거해 버린다. 다음 해 진나라의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고, 이사는 조고에게 참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그의 아들과 함께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다. 진시황 사망 직후에 이사와 조고가 공모하여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한 공범임에도 이사는 조고의 악랄한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사는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지고 멸족을 당하고 만다. 아래 문장은 형벌을 받으러 둘째 아들과 함께 함양 장터로 끌려 나갈 때, 이사가 아들을 돌아보며 한 말이다. 진시황과 함께 천하를 경영한 승상 이사가 최후에 남긴 말인데, 인생무상을 저절로 느끼게 한다. 

                          

 “너와 함께 다시 누런 사냥개를 데리고 나가 상채 동문교외에서 토끼사냥을 하고 싶구나. 이젠 그것도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구나.”      

                        吾欲與若復牽黃犬俱出上蔡東門逐狡兎 豈可得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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