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집 인근에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구입하여 독립해 나간 큰아들이 집에 잠깐 들리러 왔다가 아내의 요청으로 집안 수리도 하고 쓰레기 분리 수거도 하였습니다. 책들도 많이 내놓았습니다. 저 혼자 열흘 정도 헌 책을 폐기하는 소식을 듣고 도와주러 왔다는데, 아내가 큰아들에게 다른 일도 좀 시켰던 모양입니다. 큰아들이 집에 계속 있었으면 같이 작업하여 빨리 처리했을 텐데 저 혼자 책을 꺼내고 묶고 실어내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무더운 여름날 매일 그렇게 진을 빼고 나기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소장 책 중에 절반 정도 폐기해 버렸습니다. 이젠 그 책을 볼 날도 별로 없을 테고, 지난 10년 이상 읽지도 않은 책이 앞으로 읽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고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책이 올래 되면 그 특유의 냄새가 있어서 더 더욱 정리하려 했었지요.
아내가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니까 큰아들이 짜증이 난 모양입니다.
'남한테 돈을 주고 일을 시켜도 이렇게 기분 나쁘게 안 시키는데 식구들끼리 몸종 일 부리듯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한마디 하더니 그냥 현관문을 쾅 닫고 집을 나가버립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망연히 서 있더군요. 평소에 우리 부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큰아들이 화를 내면서 현관문을 쾅 닫고 가기에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네. 아이에게 좀 살살 말하지 그랬어'라고 혼자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요. 아내도 아내 입장에선 할 말이 있을 테지요. 아니나 다를까. 헌 책을 버리고 집으로 들어서니까 아내도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큰아들에 대한 불만을 쏟아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아들하고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왜 싸우긴 둘이 싸우고 험한 말은 왜 모두 내가 들어야 하노? 아들이 나중에 오면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낀데."
아내도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녁 내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시간이 좀 지나 카톡으로 '정말 죄송합니다'란 말만 반복하여 문자를 보내 왔네요. 제가 중간에 서서 화해를 시키느라 그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큰아들에겐 카톡으로 '효자인 큰아들이 그렇게 화가 났을 땐 이유가 있겠지. 혼자 지내면서 생각하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연락하자. 너무 깊이 신경쓰지 말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겐 말했습니다.
"당신도 평소처럼 아들에게 뭔가 부탁해서 아들도 이것 저것 했겠지. 우짜겠노. 아들도 직장에서 뭔가 짜증난 일이 있었을 것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뭔가 자꾸 시키니 화가 난 거 아이겠나. 당신도 아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거 우리 3남매가 다 알고 있는데, 좀 있으면 이해 안 해 주겠나."
그래도 아내는 표정을 바꾸지 않습니다. 큰아들에 대한 불만을 또 털어놓습니다. 이번엔 아내가 마음껏 말하도록 그냥 두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습니다. 큰아들이 전화를 걸어와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아내에겐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연락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시간이 좀 지나면 서로 서로 이해할 테니 몸조심해서 직장 다녀오고 집안에 가스불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내도 하루 지나니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 시간에 차 안에서 제가 그랬지요.
"당신 입장에서 화가 났겠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우리 살던 시대와는 정말 다르다. 난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그 지역에서 효자란 말을 정말 많이 들었고, 실제로 내 마음도 어머니께 잘 해드리려고 정말 애썼다. 어머니께 말대꾸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나를 그냥 좋아라 하고 그 흔한 '공부하'란 말도 평생 한번도 하지 않고 그냥 '우리 아들이 제일 좋다'란 말만 하셨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야 어머니 하면 하늘 같이 모셨지. 하지만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고, 요즘 젊은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도 없다. 나중에 큰아들이 죄송합니다 하면 그냥 못 이긴 척 받아주면 좋다고 생각해."
아내의 독백 겸 불만
"아니, 어려운 살림에 돈을 보태 아파트 하나 장만해 주고 했으면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이가. 그기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아이 사주에 열이 많고 그에 화도 많다고 하더니만 딱 그짝이네. 앞으로 자식들 무서워 뭐라 카겠나. 아~들 지원한다고 당신도 그리 고생했는데, 아들한테 한마디 하면 안 되나요."
아직도 아내와 큰아들의 상황은 진행형이지만 이 또한 시간이 좀더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할 날이 오겠지요. 저도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그저 우리 3남매 삶을 지원만 하지 간섭을 절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냥 아이들 판단을 존중해 주고 그들에게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힘이 닿는 만큼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살면서 화를 내는 이유가 그리 큰 데만 있는 것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아주 정말 사소한 것에도 감정이 상해서 불쑥 폭발하는 것이 사람의 감정 아니던가요. 아파트 하나 장만해 주었다고 큰아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쉽지 않네요. 앞으로 며느리가 들어오면 더한 일도 생길 텐데 아무래도 부모 자식 간에도 냉각기가 필요한 듯해요.
아내 마음도 달래고 큰아들도 진정시키는 것이 제 역할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