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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Dec 22. 2023

소소한 일상 9

플러스펜 그리고 남편

 하얀 와이셔츠 주머니로 삐죽 튀어나온 검정 플러스펜에 눈길이 갔다.

 ‘요새 누가 저런 걸 갖고 다녀?’

 그의 첫인상은 딱 플러스펜 같았다. 책상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도드라지지 않아 존재감이 없는 그런…  함께 있으면 편안했지만 보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재미있지도 않았다. 단지 얘기가 잘 통할 뿐이었다.

 난 교제하던 사람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이 누군가를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 상황을 다 말했는데도  그는 특유의 선한 웃음을 지으며 자꾸만 다가왔고 나는 차마 거절하지 못한 채 계속 만나고 있었다. 왠지 거절하면 그가 너무 힘들어 할 것 같았고 그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제법 매몰찬 구석이 있는 나였는데도 신경이 쓰였다.

 만남이 계속될수록 죄책감이 심해졌다.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만나요. 저, 연애하다 깨진 지 얼마 안 돼요. 알고 있죠? 더는 못 만나겠어요. “

 추운 겨울 어느 날, 에버랜드에서 실컷 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난 작정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어렵게 말을 꺼낸 나와 달리, 그는 빙글거리며 그러냐고, 알았다고 했다. 마침 그때 음식이 나왔다. 그는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아주 맛있게 그릇을 비웠고 난 반도 먹지 못하고 나왔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는 나의 선언을 잊은 것처럼 매일 같은 시간에 직장으로 전화하고 거절 못할 약속을 잡았다. 같은 모임에 속해 있어 계속 마주쳐야 할 상황이라 야멸차게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내 의지와 다르게 그와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고 어느새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내가 무남독녀라는 것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날 반대한다는 얘기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전했다. 드라마에서 본 얘기가 내 얘기였구나!  화가 났다.

 부모님이 반대를 하거나 말거나 난 계속 만났다. 그렇게 만나다가 헤어져도 난 아쉬울 게 없었다. 그가 상처를 받아도 그건 더 이상 내 잘못이 아니었고 부모님 책임으로 돌릴 터였다. 그런데 1년 가까이 만났을 때 그의 부모님이 만나자고 했다. 그의 집으로 갔다.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님, 고모, 삼촌까지 모두 모여 나를 훑어봤다.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 같이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버님의 한 마디에 머리가 하얘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6개월 뒤, 우린 결혼을 했다.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식 전날 울산으로 내려와 식이 시작될 때까지 그림자처럼 붙어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중에 듣자니 내가 “이 결혼 안 해! “를 외치며 도망갈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 일 없이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평범한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늘 한결같이 따뜻했다. 남자들은 잘 안 한다는 사랑한다는 말도 시도 때도 없이 했다. 가끔 진짜냐고 묻기도 할 정도로. 반면에 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물었다.

 “넌 날 사랑하니?”

 뜨끔했다. 그렇게 물어볼 만했다. 그때까지 난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쑥스러워 말을 못 하는 거라며 적당히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피했다.

 “난 이 사람을 사랑하는 걸까? 이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거였을까?”

 그동안 회피하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집들이를 하는 날이었다. 13평의 작은 아파트에 20여 명이 몰려왔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며 혼자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느라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그때 OO의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좀 피곤하네. 오빠, 나 여기서 잠깐 자도 되지?”

 남편은 흔쾌히 안방 문을 열어 줬고 OO는 하얗게 잘 정돈돼 있던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남편에게 불을 꺼 달라고도 했다. OO는 반반한 외모에 콧소리로 남자들에게 여우 짓을 곧잘 해서 내 눈밖에 나 있었지만, 남편은 대학 후배라며 잘 챙겨 주곤 했다. 갑자기 눈에 불이 번쩍 했다. 하지만 이미 들어가 누운 사람을 끌어낼 만한 배짱이 내겐 없었다.

 그날 밤, 난 미친 듯이 남편을 몰아세웠다. 큰소리로 화를 냈다. 처음 하는 부부 싸움이었다. 남편은 그게 왜 문제냐며 날 나쁜 사람 취급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물었다.

 “너, 질투하는 거니? 맞지? 그런 거지?”

  남편은 환하게 웃으며 날 끌어안았다. 난 그렇게 처음으로 내 사랑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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