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ielC Jul 04. 2019

이빨_04 EnD

단편소설집

*

비는 그쳐 있었지만 하늘에는 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기온이 뚝 떨어져 있었고 도로는 미끄러웠다. 아파트 부근을 벗어나자 안개가 스멀스멀 번지고 있었다. 나는 베이스캠프를 향해 천천히 차를 몰았다. 서둘렀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휴게소 앞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산속으로 난 콘크리트 도로를 올라갔다. 하루 종일 내린 비에 실개천 물이 불어 제법 소리가 요란했다. 다리를 건너자 안개가 짙어 상향등을 켜야 했다. 불투명한 어둠 속으로 뻗어나가는 불빛에 나무 그림자들이 이상한 형태로 스윽, 슥 지나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텔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개비 피웠다. 안개 때문인지 공기에서 숯 냄새가 났다.


노크를 가볍게 두 번 하고 304호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둥근 퀸 사이즈 침대와 간이 응접세트, 그리고 작은 옷장과 텔레비전, 천장의 전등까지 모두 싸구려 일색이었다. 방안에서도 숯 냄새가 났다. 열린 발코니 창문으로 희끄무레한 안개가 보였다. 안개꽃이 프린트된 감색 커튼 사이로 그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에 걸친 하늘색 카디건 위로 길게 묶은 생머리가 늘어져 있었다. 돌아선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연상케 했으나 아, 저 얼굴이었군,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정확한 인상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숱한 익명의 얼굴들을 조금씩 조합해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여자가 살짝 미소를 지었으나 검고 큰 두 눈에 어린 불안감을 지우지는 못했다.


“고마워요, 와줘서.”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얇은 입술을 달싹거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자는 같은 배를 탔다고 믿고 싶어 하겠지만 나는 절대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럴 이유가 내게는 부러진 이빨만큼도 없었다.


“오랜만에 비가 와서 그런지 좀 쌀쌀하군요. 아, 여기서 밖을 내다보니 그럭저럭 운치가 있네. 우리 집으로 오던가, 아니면 당신 집으로 부르던가 하지 그랬어요?”


“집에는 남편하고 딸이 있어요. 그쪽 가족에 대해선 아는 게 없구요.”


“그렇군요.”


나는 실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영혼에 다른 사람의 육체가 덧씌워진 기분이 들 정도로 표정과 행동이 어색하고 거북했다.


어색함과는 좀 다른 성질의 침묵이 한 동안 흘렀다. 그녀와 나는 담배를 몇 개비씩 초조하게 피워댔다. 도로의 자동차 소리가 이따금 들렸고 소나무 숲에서 꾸룩거리는 낯선 짐승의 기척이 가까워졌다가 잠잠해졌다. 그녀의 어깨가 추워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뉴스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말끝은 젖어 있었다. 나는 창밖의 안개와 물소리가 들리는 소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꾸룩, 꾸룩-. 낯선 짐승 소리가 멀어져 갔다.


“……열 살 때였는데, 옆집 친구네 놀러 갔었어요. 웬일인지 친구는 집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걔 방에서 기다리게 됐어요. 걘 아주 공주 같은 스타일이었죠. 예쁜 머리띠, 빗, 목걸이, 그리고 레이스가 많이 달린 드레스, 그런 게 방안 가득했어요. 처음 보는 구슬 장식이 달린 분홍색 빗과 거울 세트가 있더군요.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곱고 예뻤어요…….”


“그런데, 그게 그만 없어지고, 당신이 누명을 썼겠군요.”


나는 그녀가 잠시 사이를 두는 사이 이야기를 잘랐다. 그녀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뇨,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누명이 아니라 사실이었어요. 끝내 부정했지만 실은 그걸 훔쳤던 거예요. 그 일로, 친구 사이도 깨졌고 어른들 사이도 나빠졌어요. 그 집이 나중에 사업에 실패해서 이사 갈 때까지,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런 어색한 이웃 관계가 지속됐었죠. 내가 친구 물건에 손만 대지 않았어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아니, 나중에라도 솔직히 진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했더라면…….”


“어쩌면 그 집이 망해서 이사 가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네, 정말. 이 얘길 누구한테 하는 건 처음이에요.”


그녀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인생의 비밀을 나한테 털어놓은 겁니까?”


“죄책감에 대한 얘기예요.”


“그래, 그 빗과 거울은 어쨌어요?”


“지금도 갖고 있다면 믿겠어요?”


내가 묻자 그녀가 물음으로 대답했다.


바람이 선뜻 불었다. 솔숲에서 바닷소리가 났다. 안개가 일렁거렸다. 추웠다. 우리들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소파에 앉고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공간과 시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난……새벽 두 시 반쯤이었는데, 에프엠을 듣고 있었으니까, 틀림없어요. 그 삼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어요.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삼거리를 거칩니다.”


“비가 많이 내렸고 시야가 굉장히 좁았어요. 너무 피곤해서 어서 빨리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에 과속을 하고 있었죠. 뭔가가 바퀴에 걸렸고 차가 심하게 튀어올랐어요. 하지만 그냥 도로에 뭐가 떨어졌겠거니 대수롭잖게 생각했죠. 그런 날씨에, 그런 시간에 더군다나 거긴 사람이 횡단하는 도로도 아니었으니까……. 아침에 뉴스를 보다가 남편이 그러더군요. 당신도 저 길로 왔을 거 아냐? 그 사람은 그냥 장난스럽게 말한 거였어요. 그냥 농담처럼…….”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를 변호한다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나는 단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쪽은 낮에……삼거리에 왜 갔었죠?”


“말했잖아요, 전화 때문에 잠깐 섰던 거라구. 나도 뉴스를 보긴 봤어요. 해장국을 먹다가 입맛이 가시더군요. 하지만 당신처럼 뭔가 걸렸던 건 아니었어.”


“그랬군요. 오래 있지 못한다고 하셨죠? 벌써 열두 시가 다 됐네요.”


“어쩌려는 건데요? 경찰에 자수라도 할 겁니까?”


“적어도 죄책감은 덜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온통 뒤집어쓸 수도 있어요.”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남편과 딸은 어떡하구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이렇게 말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젠장, 하고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담배를 내밀자 그녀는 고개를 젓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우면서 좀 자고 싶다고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나는 소파 옆의 작은 스탠드만 남기고 불을 껐다. 소파에 편안히 몸을 기대자 피곤이 목덜미와 어깨를 깊숙이 잡아당겼다. 이대로 잠이 들어도 되는 걸까? 불안이 엷은 복통처럼 스르르 밀려들었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더 피우고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밝은 달빛이 이마에 닿을 듯이 빛났다. 그것은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 두 시였다. 그 여자는 아까 누운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침대 발치로 다가갔다. 여자의 가슴과 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달빛 때문인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볼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숨을 쉰다면, 경찰에 자수를 하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든 그것은 그녀의 문제였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 한다.


몇 시간 뒤에 회의가 있어서……, 하고 나는 속으로만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 방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에프엠을 들었다. 차창 가득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밤공기가 차갑게 끼쳐 들었고 딥 퍼플(Deep Purple)의 허쉬(hush)가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짧고 강렬한 악몽에서 벗어나 다시금 일상으로 귀환하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기 전에 나는 이빨을 변기에 넣고 물을 세 번이나 내렸다. 그 여자에게 이빨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녀가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는 게 조금 찜찜했지만 대수로운 건 아니다. 어차피 우리는 입을 다물고 영원히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린 공범들이니까 말이다.


EnD


매거진의 이전글 이빨_0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