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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24. 2019

굿바이 크루얼 월드_03

단편소설집

이튿날, 우리들은 아침을 거른 채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늙은 수부를 닮은 기관사가 모는 기차를 타고 부두까지 나와서 동력선을 타고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섬을 빠져나왔다.


개는 이상하리 만치 흰 창이 많은 눈을 흡뜨면서 크르렁거리더니 천천히 부두 쪽으로 사라졌다. 너는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개를 흘끔 돌아보고 나서 침을 찍 뱉었다.


지겨워.


너는 입술을 핥으면서 정말 지겨운 표정으로 지껄였다. 그래, 우리는 겨우 하루 만에 뭍으로 올라오고 말았지,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너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 지겹다. 비는 왜 이렇게 감질나게 오는 거야, 대체?


누가 아니래?


그리고 우리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주차해 둔 너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뽀얀 안개비 속에 너의 잿빛 중형차는 마치 말라죽은 바퀴벌레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너의 차는 외롭고 쓸쓸했다. 가는 바람에 흐느적대는 포플러 나무와 파랗게 물이 오른 아주까리와 그리고 들국화를 닮은 들꽃들, 포도(鋪道)를 시각적으로 물렁물렁 느껴지게 하는 안개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는 운전석에,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차 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 몸에서 풍겨 나는 냄새인지도 몰랐다. 너는 한참만에 시동을 걸었다. 카세트 데크에 꽂혀 있던 샌드로즈의 <비전>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창의 물기를 닦아 내면서 가느다란 비명 소리를 냈다. 김이 서리지 않도록 에어컨을 작동시켜서 으스스 추웠다.


너는 막연하고 권태로운 표정으로 뽀얀 시계(視界)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라고 너의 옆얼굴이 내게 묻고 있는 듯했다.


도로가 이어져 있긴 한 걸까?


그렇게 말한 너는 차를 출발시켰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호각 소리에 놀란 너는 제동을 걸었다. 네가 평소보다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는 앞유리에 머리를 박을 뻔하였다.


돌아보니 파란 비닐우산을 펄럭이면서 이쪽으로 뛰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상태였는데도 그만 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작달막한 키에 안장 다리로 휘우뚱거리며 뛰어오는 모양이 마치 비닐우산에 질질 끌려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너는 아무 말 없이 백미러 속을 쏘아보고 있었다. 턱뼈가 불쑥 드러났다가 가라앉았다. 이라도 갈았단 말인가. 나는 한순간 너의 까닭도 없고 대상도 없는 적대감에 진저리를 쳤다. 때때로 그 지향 없는 적대감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이된 것처럼 여겨져 나는 너를 멀리하고야 말리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물론 생각에만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비닐우산을 쓴 사람이 운전석 옆 창을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렸다. 너는 입술을 최대한 작게 오므리고 눈을 가늘게 뜬 심술 맞은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다가는 차창을 겨우 10센티미터 정도 내렸다.


주차료, 주차룔 내구 가야지.


파랗게 질린 마른 입술과 입술 주위의 쭈글쭈글한 피부, 무엇보다도 낡은 엔진에 과부하가 걸렸을 때 나는 듯한 힘겨운 목소리가 대뜸 상대방이 노인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주차 관리인이 노인이라는 건 별로 이상할 게 못된다. 이상한 것은 우리가 전날부터 마주치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력선의 선장, 노인이었다. 용역 회사의 인부들, 노인이었다. 섬의 기관사는 말했듯이 노인이었다. 호텔 식당의 찬모들도 노인이었다. 호텔 프런트의 직원? 그가 노인이었던가, 아니었던가? 전날 저녁, 우리들은 하릴없이 로비에 앉아서 그를 한동안 관찰했었다. 그런데 그가 노인이었던가, 아니었던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으므로 그는 노인이어도 좋다. 세상에, 전부 노인이다!


나는 내려진 차창으로 노인의 쪼그라든 인중과 입술과 턱과 턱 밑으로 쭈글쭈글한 목의 피부 따위를 내다보았다.


또 노인네로군. 안 그래?


너는 고개를 빼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너는 진작부터 그 사실에 대해 지겨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 주차료!


마디가 뭉툭하고 손톱 밑에 때가 새카만 노인의 손이 열린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갓길 주차장이란 말이야. 어제부터 하루치 계산하면⋯⋯에, 2만 하구 5천 원이구만.
창으로 들어왔던 때에 전 손이 빠져나갔다가 노란 종이를 들고 돌아왔다. 너는 그것을 낚아채서 보지도 않고 대시보드 위에 팽개쳤다. 그리고는 오디오의 볼륨을 잔뜩 높였다. 나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 때에 찌든 손에 쥐어 주었다. 지폐를 움켜쥐는 손등 위로 굵게 불거진 동맥이 꿈틀거렸다.


다녀들 가슈.


너는 급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언뜻 백미러에 비친 노인의 깡마른 몸이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노인은 달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휘우뚱거리며 까마득히 멀어졌다.


나는 샌드로즈의 노래가 성가셔서 오디오를 껐다. 타이어가 노면을 훑으며 물을 튀기는 소리만이 편안함을 자아냈다.


정말 지겨워. 어디 가나 말이야. 그 지랄 같은 영수증, 계산서, 청구서 말이야, 박박 찢어 줄래?


계산서가, 영수증이, 청구서가 지겹다는 말인가? 아니면 노인들이 지겹다는 말인가? 나는 영수증을 집어 들어 손에 잡힐 때까지 꼭꼭 반씩 접어 찢었다. 그리고 차창을 내리고 던져 버렸다.


어디로 가지?


나는 빗방울이 세차게 들이쳐서 재빨리 창을 올리고 나서 너에게 물었다. 너는 그 사이 피워 문 담배를 깊이 빨면서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네가 결정해 봐. 넌 어째서 한 번도 뭘 결정하지 못하는 거냐?


너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짜증스럽다는 지껄였다.


결정? 결정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는 잠깐 동안 ‘결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상상력이 말라붙은 내 머리로는 ‘결정’으로 인해 연상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해서 나는 간단히 지껄이고 말았다.


달려.


간단한 지껄임이었으나 그다지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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