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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26. 2019

굿바이 크루얼 월드_05

단편소설집

⋯⋯밤새 선풍기 바람을 쐰 것처럼 머릿속이 퍼석퍼석하다. 방금 전 소파에서 잠자던 여자가 떠났다. 그 여자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더니 화난 표정으로 담배를 두 대 피우고 내게 택시비를 좀 꿔 달라고 말했다. 갚을 것 없다고 말하며 돈을 내밀자 그녀는 더욱 화를 내면서 돈을 낚아채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는 틀림없이 매력적이었으나 나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게 없었다. 나의 첫 경험이, 그러니까 너와 가졌던 그 섬에서의 첫 경험이 얼마나 슬펐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 당연히 모종의 기대감이 무너졌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가 정확하게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어째서 화창한 가을날의 주말 오후에 나를 찾아와 마구 술을 들이켜고 무방비 상태의 자세로 소파에서 늘어지게 잔 뒤에 화를 내고 돌아갔는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전혀 의사소통될 가능성이 없는 거였다.


나는 그녀가 어지럽혀 둔 탁자를 정리하고 재떨이를 비우고 설거지를 하느라 잠시 수선을 떨었다.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다. 특히 오늘처럼 치통이 극심한 날에는 더욱 그렇다.


진통제 3알을 나누어 삼키고 나서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문서 편집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너에 비하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너는 나의 ID와 그 섬에는 기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내게 편지를 보낼 수 있지만, 나는 그 섬에는 기차가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네게 편지를 보낼 수 없다. 나는 너의 이름도 모르고 ID도 모른다. 애초에 너와의 관계는 불공정했다고 생각된다.


-환상적인 타입을 찾으시는군요, 라고 웨이터 황영조가 말했을 때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의사 표현을 해야 했다. 그랬다면 너라는 사람은 내 기억에 입력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제 편지를 수신하지 않을 것이다. 아예 통신망과 접속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동해안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어느 순간, 네가 이 땅의 등허리를 타고 끝까지 내려갔을 때 무슨 일인가 생길 것만 같다.
이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그리고 너의 두 줄짜리 편지들이 내게 던지는 견디기 힘든 단절감들을 떨쳐 내기 위해서 나는 세계와 이어진 모든 것들을 이제 끊어 버리기로 했다. 이어져 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억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통신망 속의 PINKY는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한동안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사에서 매달 통신 요금을 빼 가는 계좌를 폐쇄하는 일이다.


나는, 책상 밑과 책꽂이 뒤편으로 어지럽게 꼬여 있는 전화선과 TV안테나선들을 찾아내 천천히 분리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컴퓨터의 전원을 뽑아 버린다. 모니터가 한순간 하얗게 빛을 발한 뒤 꺼진다. 순간, 세계와 이어진 어지러운 상념들이 모니터의 공동(空洞)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너는 이제 내 기억 속에 흔적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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