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만이라도, 당신이 집에 돌아갈 걱정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런 거예요. 어디라도 좋으니까 멀리 여행을 가는 거야. 그래서 불안에 떨지 않고 푹 자고 싶어요. 난, 일찍 일어나서 당신을 위해 아침밥을 지어요. 당신은 행복한 얼굴로 잠을 깨고 반찬투정하면서 밥을 먹구요.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거뿐이에요. 그리고 우린 돌아와요. 난 그렇게 단순해요. 그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널 위해 뭘 해줄 게 없을까, 고 묻자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건 강수연이 나왔던 <지독한 사랑>에서나 나올 이야기 아냐?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꾸며대는 얘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기이한 여행이 가능하다면 그건 우리들 자신을 기만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행 이후에 그녀가 더 큰 요구를 해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리고 완전한 이해도 불가능했다.
2.
뾰족한 여자가 꿈에 보였어요. 눈과 코와 귀가, 입술이며 얼굴 전체가, 느낌과 말소리와 행동까지 뾰족한 여자였어요. 그녀가 꿈에 나타나 카트리지처럼 원반 위를 맴돌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기분 좋지 않은 꿈이었죠. 어쩌면 이건 지어낸 꿈 이야기인지도 몰라요. 벌써 3년이나 지난 이야기니까요. 기억이란 가끔 그렇게 꿈처럼 꿈꾸듯이 몽롱하게 풀어지고 또 생생해지기도 해요. 어쨌든 그런 꿈을 꾼 거 같아요. 깨어났을 때, 비 오는 새벽이었어요. 방은 눅눅했고 나는 사흘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잤던 거 같아요.
난 카세트에 녹음을 시작했어요. 그날 새벽에야 비로소 모든 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거예요. 결국 당신이 이 얘기를 듣게 되는 날이 오겠죠.
이렇게 시작할게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말이에요. 나는 그런 당신을 위해, 당신이 좋아하는 촛불을 켜곤 했죠. 시장에 갔었어요. 생각보다 초의 종류가 엄청 많다는 걸 알고 어린아이처럼 환성을 질렀어요. 아, 그래, 그 사람다워, 하고 저는 마냥 즐거운 심정이 되어서 사과 모양, 양말 모양, 별 모양, 나무 모양, 집 모양... 알록달록한 초들을 긁어모으듯 샀어요. 조금 비싸긴 했지만-이런 말 우습죠. 하지만, 사실 우스운 건 아니에요-. 아마 난 수중에 돈이 없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초들을 손에 넣고 말았을 거예요. 그건, 정말이지 도둑질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지금, 아, 지금이라면 차마 그런 짓은 상상하지 않겠죠.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죠? 당신은 이제 내게서 너무 먼 사람, 난 이렇게 당신을 덜어내고 있어요. 가슴 저 깊은 우물 속에서 힘겨운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하늘 저 멀리로 퍼내고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비가 되어 내릴지도 몰라요. 아무렴 어때요. 난 아마 그때쯤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사랑이란 그런 거예요. 그렇게 노심초사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잔머리를 굴리고 늘상 둘러대고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거...
이봐요, 아시겠어요? 결국 당신이 듣게 될 소리는 날 가지고 놀았다는 얘기뿐일 걸요. 물론 당신은 상황 탓을 할 거예요. 사실, 당신이 옳은 건지도 몰라요. 당신이 날 농락했든, 아니면 내가 당신을 유혹하고 마침내는 배신을 당했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 되는 거죠. 당신이 말하듯 상황이 그렇게 됐을 뿐인지도 몰라요. 우연이 자꾸자꾸 쌓여서 인연이 되는 거... 뭐 그런 건가 봐요.
돌아보면 우리에겐 아무런 추억거리도 없어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어떤 냄새, 특정하지 않은 어떤 방들, 어수선한 꿈과 지독한 아침뿐이에요. 허물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돌아서지도, 머물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당신...
어서 가요.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 게 행복했어요. 그리고 혼자 돌아오는 길 내내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요. 그런 순간만은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어요. 차라리 눈부신 아침 햇살과 나뭇잎과 지나가는 강아지들, 그런 것들과 나는 소리소리 지르면서 뛰놀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겠지요. 구르는 낙엽을 따라 께금발로 뛰면서 깔깔대는 나를 말이에요. 사실, 하늘이 너무 높파랗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지만 눈물을 흘리게 되면 이제껏 쓸어안고 있던 가슴속의 소중한 뭔가가 한꺼번에 와르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그런 식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난 미친 여자처럼 머리를 흔들며 걸었어요. 알죠? 내가 늘 끼고 다니던 낡아빠진 카세트 라디오... 이어폰을 꽂고 모두들 출근하는 거리를 나는 거꾸로 걸어가요. 마리 위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진동이 느껴져요. 그리고 연기 냄새나는 거리엔 아마 사람들 발짝 소리가 박수처럼 가득하겠죠. 난 이어폰을 꽂고 있어요. 당신은 한 번도 내가 어떤 노래를 듣는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아니, 묻지도 않았어요. 그래요, 당신의 속내를 다 아는 것처럼 단정 지어 말하지 말기로 해요. 사실 잘못은 내게도 있으니까요. 나 역시 당신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면 카세트를 멈추고 재잘재잘 떠들어댔으니까요. 한 번도 어떤 노래인지 당신에게 들려주지 않았어요. 이제 그 노래 얘길 해줄게요.
그들은 미국에서 돌아왔어요. 흔해 빠진 교포 출신 가수들이죠. k와 q, 그들은 6개월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단 한 장의 앨범을 재고 창고에 쌓아둔 채 말이에요. 방송 한 번 타본 적 없고 누구 하나 그들을 기억하지 않아요. 음반사 사장조차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어요. 특별히 투자한 것도 없고 그들 때문에 손해 본 것도 없으니까요. 세상은 그런 존재들을 아주 간단히 기억에서 지워버려요.
내가 그들을 만난 건 어느 늦은 여름이었어요. 다음 학기 등록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죠. 난 스물세 살이었어요. 아빠의 기일이었고,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요.
아직 개강 전이어서 학생회관은 한산했어요. 취업 지도과에서 마땅한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돌아 나온 나는 학생회관 현관 처마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요. 주변에는 복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몇 명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시시덕거리고 있었고 장대비가 내리는 회관 앞 도로를 노란 비옷을 입은 중국집 배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가로질러 갔어요. 나는 오한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어요. 문제는 우산을 펴기가 싫었던 거예요. <대웅 슈퍼>라고 선명하게 프린트된 하얀 우산, 살이 하나 부러져 푹 꺼진 그 우산을 펴 들 수 없어서 나는 아득하게 절망하면서 포도를 때린 빗물이 안개처럼 뿌옇게 흘러 다니는 교정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어요. 내 의식은 날개 꺾인 비둘기처럼 한 자리만 맴돌았어요. 이제 우산을 펴 들고 계단을 세 개 내려서서 교문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올 곳이 없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내가 갈 곳은, 나를 기다려줄 곳은 없다, 그런 생각 말이에요.
사실 그건 느닷없는, 조금은 과장된 절망감이었어요. 아시잖아요, 그때 난 스물셋이었어요. 4년 전 교무실로 걸려온 전화,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왠지 측은한 표정으로 어서 가방을 챙겨라, 고 말하던 인정머리 없기로 유명한 학생과 선생님, 그리고 병원까지 동반해준 담임선생님, 이미 거무죽죽하게 변한 시트를 뒤집어쓰고 잠자듯 누워 있는 아빠의 창백한 얼굴, 무표정하게 오가는 사람들, 농담을 주고받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영안실 직원들.... 그런 인상들이 막 우산을 펴 들려던 내 손을 멈추게 한 거죠. 4년 전 그날의 그 사건이 남은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 내 모든 꿈과 희망, 사랑의 날개가 꺾였다는 걸 말이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운명을 거스를 수도 피할 수도 없다는 사실, 그건 바로 절망이었어요.
복학생 남자들은 군대와 여자 얘기로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 예비역의 눈길이 오래전부터 바들바들 떨며 비 오는 교정을 쏘아보고 있는 추레한 여자에게 쏠리기 시작했다는 걸 나는 알았어요. 어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어요. 하지만 살이 부러진 우산을 펴 들고, 슈퍼마켓 개업 선물로 받은 우산을 펴 들고 한 발짝만 내딛으면 그대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어요. 그건 슬픔이 아니라 불안감이었어요. 생리일에 좌석이 다 찬 버스에 올라타 홀로 서 있는 그런 느낌 말이에요.
차라리 그 남학생들이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말을 붙여주었으면 했어요. 시간을 좀 내달라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술도 마시고 함께 춤도 출 수 있겠죠. 불안함을 떨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다 마침내 혼자 남겨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건 누구에게나 결국 일어나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날, 그 장소에서 우산을 펴 들고 혼자 걸어 나오긴 싫었어요. 그건 너무 무서운 일이었죠.
그때 조심스럽게 내 이름이 불리워졌어요. 그 소리는 빗소리가 울려대는 어깨너머 로비에서 들려왔어요. 돌아보기도 전에 나는 구원 천사의 음성을 들은 소녀처럼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그 목소리는 내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어요.
... 학생.
이번엔 정확히 학생이라고 호칭을 달았죠. 나는 눈물을 삼키고 돌아봤어요. 당신은 어색한 각도로 고개를 기울이고 손에 든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두꺼운 검은테 안경이 코끝에 걸려 있는데 푹 꺼진 눈두덩은 웅덩이처럼 깊어 보였어요. 한숨이 아랫배에서 스르르 새어 나왔어요. 당신의 눈 웅덩이에 슬픔이 가득 고여 있는 걸 보았던 거죠.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이 나를 구원하다니... 어쩐지 나는 이 사람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던 낯익은 그 사람이었어요.
“아직 안 가서 다행입니다. 학생이 나가고 나서 바로 팩스가 들어왔는데...”
당신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두 장을 양손에 나눠 들고 팔랑팔랑 흔들었어요.
“일자리가 절실한 거 같아서.... 어서 와요.”
당신은 빠르고 사무적인 말투로 말하고 나서 취업 지도과를 향해 앞장서 걸어갔어요. 나는 구김이 많이 간 당신의 베이지색 바지의 종아리께에 시선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따라갔어요. 기분은 그런대로 나아지고 있었어요. 현관 처마 밑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거,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말이죠.
“음반 회사의 창고 재고 파악하는 일인데 보수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지만 재미는 있을 거예요. 어때요, 해보겠어요?”
당신은 아르바이트 협조 공문을 내게 내밀고 가지런한 흰 이를 드러내 보였어요. 사람 좋은 웃음이었죠.
이봐요, 지금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때가 아니란 거 알잖아요. 그렇게 웃는 것마저도 날 조롱하는 거예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당신은 그 자리에서 음반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직접 추천을 해주었죠. 그리고 게시할 필요가 없어진 의뢰 공문을 서류철에 끼워 넣은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어요. 나는 상담 테이블에서 일어나 우두커니 서서 당신을 바라보았죠. 가늘고 긴 손, 뼈가 잘못된 것처럼 툭 불거진 손목, 그리고 몇 번을 고쳐 올려도 몸의 움직임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내리는 검은 뿔테 안경.... 당신의 눈빛은 지극히 권태롭고 사무적으로 돌아가 있었어요. 최소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했어요. 아직 나는 그런 모습이 당신의 고유한 영역, 이를테면 스타일이란 걸 몰랐던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 철저한 무관심 때문에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어째서 나 따위를 위해 밖에까지 나왔단 말인가. 생각해보니 그건 친절도 무엇도 아니었던 거예요. 당신은 취업 지도과의 직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것도 아주 신속히 처리했을 뿐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한 가장 무표정하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나 당신은 막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죠. 나는 입술을 깨물었어요. 그때 당신의 깊이 패인 시선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어요. 입으로는 누군가와 얘길 하면서 “아직 거기 있었니?” 하고 눈으로 말하는 것 같았어요. 당신은 수화기를 손으로 가리고 말했어요.
“학생, 세 시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해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당신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어요.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쳐서 방을 나왔어요. 밖으로 나왔을 때,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있었어요. 구름이 하늘 가장자리로 빠르게 흘러가고 또 흘러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