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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어 Nov 14. 2021

궁금한 관계

상상해 보세요

봄눈치곤 제법 무겁게 내린 눈이 아직 채 치워지지 않았던 날, 오전 10시도 되지 않아 신고가 접수됐다.  

    

“아는 사람이 나가라고 해도 집에서 나가지 않는다.” 신고자는 여성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지만 시간이 이상했다. 보통은 저녁 시간에 연인 또는 아직 연인임이 서로 확인되지 않은 사이에서 상대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어나는 사건이다. 출근 시간이 이제 막 지났는데 일어나기엔 좀 이상한 사건이었다.     


 골목의 눈 때문에 순찰차가 들어가지도 못해 큰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쌓아놓은 눈을 피해 어렵사리 도착한 여자의 집은 투룸 정도였는데, 빼꼼히 연 문 틈새로 여자는 이제 막 도착한 우리를 되돌려 보내려 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문을 닫을 것 같은 여자에게 힘주어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단호하게 말해야 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기 전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여자는 두어 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고 그저 아는 사람과 술을 마신 뒤에 집까지 왔다가 그 사람이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 지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또 얼마나 오래 알아 온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저 어제저녁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경찰이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 곤혹스러워하는 여자에게 그때 전화가 걸려 왔다. 여자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 뒤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나요?”     


전화 속의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 것이 들렸다. 여자는 여전히 곤란해하며 대답을 이어갔다.     


“피곤해서 인제 그만 자고 싶어요”     


남자도 역시 맥락과 상관없는 질문을 이어갔다.     


“누가 왔나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질문에 적합하지 않은 대답, 아니 질문을 이어가며 시간을 소모했다. 더 이상 기다려 줄 수 없다고 판단돼 손가락으로 직접 통화 종료 버튼을 지그시 눌렀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마신 것으로 보이는 소주병과 맥주캔이 놓여 있었다. 살림살이는 단출해서 대학생 자취방 분위기였지만 의외로 여자는 나이가 40을 갓 넘긴 사람이었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상황인 것 같은데, 만약 계속 말하지 않는다면 그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 남자는 아마 당신을 우습게 생각할 겁니다.”     


 여자의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 직격탄을 날렸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남녀가 연루된 사건은 부부관계를 포함해 외부에 도움을 구하길 꺼리는 여자의 태도가 사건을 더 키우기 마련이다. 자신들 사이의 일을 여자가 절대 외부에, 특히 경찰에 알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남자는 그 여자를 함부로 대한다는 것이 많은 사건에서 확인된, 그러니까 임상 사례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피해를 알리고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아마 그 남자도 우습게 보지 못할 겁니다”     


 다시 한번 여자를 재촉했다. 여자는 마지못해 입을 열기는 했으나 여전히 남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인데 집까지 와서 술 한잔했고 남자에게 돌아갈 것을 요구했지만 돌아가지 않아서 112 신고를 했다고 했는데, 경찰이 도착하기 직전 남자가 떠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여자의 집으로 출동하는 와중에 또 한 건의 신고가 접수됐었다. 신고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 남녀의 다투는 소리만 들리다 전화가 끊겼던 것이 신고내용이었다. 상황실 위치조회가 최초 여자의 신고가 접수된 곳과 동일한 위치였다. 여자의 전화가 울릴 때 슬쩍 봤던 발신 번호 네 자리는 그 특이한 신고의 번호와 동일한 번호였다.      


“달리 피해가 없고 더 이상 경찰의 개입을 거부하신다며 일단 철수는 하겠습니다만 혹시라도 남자가 되돌아올지 모르니 문단속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여자는 경찰의 권고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문을 차갑게 닫았다. 철수하는 동료들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 L과 통화하면서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과연 여자는 남자와 어떻게 만났고 어떤 사이일지 추측해 보라고 했다. 잠깐 뜸을 들인 L은 술술 상상력을 발휘했다. 여자는 어제 랜덤채팅 앱으로 남자를 만났고 술 한잔하면서 남자가 맘에 들었고 집까지 데려왔다. 하지만 여자는 그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함께 대화 정도만 원했던 것인데 남자가 더 많은 것을 요구해서 신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상상력은 좋았지만,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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