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만으로는 나를 지킬 수 없어서

상대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나를 잃지 않는 태도에 대하여

by 지혜

〈다정하지만 흐리지 않는 사람〉 첫 번째 글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정함만으로는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조금 늦게 알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 쌓인뒤였다.


누군가의 무례를 웃으며 넘긴 뒤에 혼자 오래 기분이 가라앉는 날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자꾸 그 장면이 떠올랐다. 왜 그 말을 그냥 넘겼을까. 왜 나는 늘 지나간 뒤에야 불편했다고 인정할까.


한때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사람, 가능한 한 한 번 더 이해하고 한 번 더 참는 사람. 그런 태도가 좋은 어른의 모습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실제로 세상은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기보다 편하게 여긴다. 부드럽게 말하고, 웬만한 일은 넘기고, 자신의 기분보다 상대의 사정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 곁에서는 누구나 조금 느슨해질 수 있으니까.


문제는 다정함이 자주 오해된다는 데 있다.
배려는 쉬운 사람이라는 인상으로 바뀌고, 침묵은 동의가 되며, 한 번 넘어간 일은 다음에도 넘어갈 일처럼 취급된다. 나는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 조용했던 적이 많았는데, 지나고 보면 그 조용함은 좋은 성품으로 남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편리한 여지였고, 누군가에게는 얼마든지 기대도 되는 틈이었다.


예전의 나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충분하면 관계도 자연히 좋아질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관계는 이해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어떤 관계는 오히려 경계가 분명할 때 더 오래 유지된다. 어디까지 괜찮고 어디부터는 곤란한지, 무엇은 받아들일 수 있고 무엇은 받아들일 수 없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된다. 다정함만으로는 관계를 지킬 수 없고, 결국 단호함과 경계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걸 늦게 알았다.


그래서 이제는 다정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다정한 단호함에 더 가깝다.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나 역시 상처받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태도. 이해하려 애쓰되, 그 이해가 나를 소모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붙드는 힘. 부드러운 말투를 유지하면서도 내용만큼은 흐리지 않는 태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차가운 결심이 아니라, 늦게 배운 예의에 가깝다.


다정한 단호함은 대단한 장면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무리한 부탁을 받았을 때 즉시 미안해하지 않는 것. 농담처럼 던져진 무례를 웃으며 삼키지 않는 것. 계속해서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관계에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는 것. 설명해도 바뀌지 않을 사람에게 끝없는 해명을 멈추는 것. 이런 태도는 작고 조용해 보이지만 사실은 내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꽤 분명한 선언이다.


물론 단호함은 종종 오해를 산다.
예전에는 누군가에게 선을 긋고 돌아서면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가 너무 차가웠나, 너무 예민했나, 조금 더 좋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자책은 늘 상대를 위한 것이기보다 관계를 잃고 싶지 않은 내 불안에서 시작되곤 했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 이해심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그래서 뒤늦게 알게 됐다. 단호하지 못했던 순간들 중 많은 부분은 사실 다정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였다는 것을.


진짜 다정함은 아마 그 두려움을 통과한 뒤에야 생기는 것 같다.
무조건 맞춰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잃지 않는 사람.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를 먼저 지키는 사람. 다정한 단호함은 상대를 벌주기 위한 태도가 아니다. 나를 보호하면서도 세계를 너무 미워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방식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드러운 사람보다 분명한 사람이 더 다정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이 어려운지, 어디까지는 함께할 수 있고 어디부터는 물러나야 하는지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차갑지 않다. 오히려 쓸데없는 기대를 키우지 않기 때문에 더 친절하다. 애매한 희망 대신 정확한 태도를 주고, 무책임한 온기 대신 믿을 수 있는 거리감을 준다.


이제 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대신 내 마음을 함부로 소모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부드럽게 말할 수 있지만 흐리지 않는 사람, 이해할 수 있지만 휩쓸리지 않는 사람, 마음은 따뜻하게 두되 문은 아무에게나 열어두지 않는 사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다정한 단호함이다.


어쩌면 어른의 다정함은 환하게 웃으며 다 받아주는 얼굴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태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나 역시 함부로 다루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이 꼭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삶의 태도로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부드럽지만 무르지 않게.
서늘하지만 차갑지 않게.
다정하지만 끝내 나를 잃지 않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