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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 Jun 07. 2021

새 시작을 준비하는 일상

노는 게 제일 좋아

    최종 계약서에 사인한 후 5월 동안에는 런던 한달살이 하는 기분으로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 원 없이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것들이라 해봤자 갤러리 가기, 공원 가서 멍 때리기, 카페 가서 책 읽기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이야말로 막상 여기서 먹고살게 되어보니 외노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일상이었다. 게다가 근 1년간은 코로나 때문에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런던의 모습들은 예전 내 인스타그램 피드에나 박제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여유가 생긴 김에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오는 런던을 최대한 알차게 즐기고 싶었다.

요즘 본격적인 여름 날씨가 시작된 런던은 매일 눈이 부시게 예쁘다.

     런던으로 이사 오면 매일 갤러리랑 박물관 보러 다닐 줄 알았는데... 그치만 내 퇴근시간에 그들도 모두 문을 닫는다는 게 함정ㅋㅋㅋ 그렇다고 주말에 가면 내가 사람 뒤통수를 보는 건지 작품을 보는 건지 알 수 없게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별로 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백수 된 김에 도장깨기 하는 마음으로 평일에 갤러리를 거의 매일 하루에 하나씩 보러 다녔다. 코시국이라 입장 인원이 제한된데다 관광객이 빠져 한산한 내셔널 갤러리를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고, 한국이든 영국이든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았던 호크니전도 평일에 RA에 슬렁슬렁 무료 전시 보러 갔다가 운 좋게 취소표 줍줍해서 볼 수 있었다. 유명한 갤러리들 말고도 소규모 갤러리들도 찾아보다가 집 문 열면 3분 거리에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갤러리가 있다는 걸 발견해서 미술사 교양 시간에 비디오로만 봤었던 작품을 동네 마실 나가는 기분으로 보고 왔다. 보고 싶은 갤러리를 다 보고 나서는 집에만 있자니 계속 핸드폰만 보고 뒹굴거려서 테이트 멤버십 산 김에 테이트 모던 멤버십 라운지를 거의 스터디 카페처럼 썼다..ㅋㅋ

내 최애 내셔널 갤러리 43번 방. 이렇게 사람 없이 한산한 거 처음 봄;;
의외의 수프 맛집인 테이트 모던 멤버십 라운지 바ㅋㅋ테이트 모던 가서 미술작품은 안 보고 매일 알고리즘 문제를 풀었다

    5월 마지막 주에는 코츠월드로 휴가를 다녀왔다. 남편과 나 둘 다 공휴일이 있는 줄 모르고 넋 놓고 있다가 그 전주에야 부랴부랴 호텔을 알아봤는데 코츠월드 안의 모든 호텔은 이미 모두 풀 부킹이었다.. 결국 코츠월드 근처에 남아있는 호텔 중 그나마 후기가 좋고 4성급인 호텔을 겨우 예약했다. 하루는 호텔에서 여유 있게 쉬려고 2박 3일로 일정을 잡은 건데 4성급은 무슨 2성급 같은 퀄리티의 호텔이라 2박 3일로 계획한 휴가를 급 1박 2일로 변경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ㅋㅋ 그래도 영국 서머타임다운 눈부신 날씨였고, 사람이 많은 피크타임 시간대를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며 간만에 긴 산책도 하고 비어가든에서 낮술도 하는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사진은 세상 평화롭지만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바이버리.. 마을 중심보다는 외곽의 산책로가 훨씬 예뻤다.

    이번 주에는 홈오피스를 위한 회사 물건들이 한가득 도착했다. 맥북프로를 준다더니 뜬금없이 씽크패드가 도착해서 멘붕이었는데, 이건 회사 프로토콜로 모두에게 지급하는 거고 개발용으로 쓰라고 맥북프로를 따로 또 보내주었다. (이리하여 사람은 둘인 집에 노트북만 5대, 데스크탑은 3대가 되었다..) 그리고 원래는 랩탑 모니터에 외부 모니터를 추가해 듀얼 스크린을 쓰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모니터를 하나 더 보내줘서 모니터를 두 대 다 쓰면서 랩탑들은 뒤에 세워 보관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모니터를 두꺼운 남편 전공 서적 위에 올려두고 썼는데 내 눈높이에는 여전히 낮아서 계속 구부정하게 앉아있어야 했다. 이렇게 계속 쓰다간 내 목이 거북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갈 것 같아서 모니터 받침대를 샀다. 이젠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일할 수 있는데다 책상에서 어쩔 줄 모르고 굴러다니던 필기구들을 깔끔하게 정리해둘 수도 있게 되어서 넘나 속이 시원하다!! 원한다면 회사에 업무용 책상도 따로 신청할 수 있는데 지금 안 그래도 둘이 재택근무하기엔 좁은 집에 도저히 책상을 하나 더 끼워 넣을 공간이 없어서, 책상은 이사를 가면 신청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데스크 셋업 완성! 웹캠 늦게 도착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제시간에 와서 다행이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계약은 이미 4월에 만료되었는데, 집주인이 이사 나가기 1개월 전에 노티스를 주면 된다고 해서 일단은 계약을 연장해가면서 살다가 내 이직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었다. 그래서 슬슬 새로 렌트할 집을 찾아보다가 이 돈을 매달 월세로 내느니 차라리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받고 집을 사면 어떨까 찾아봤더니 남편과 내 연봉을 합치면 지금 살고 있는 워털루 지역에 방 두 개나 세 개 정도의 플랏은 살 수 있겠다는 결론이 났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갈까도 생각해 봤는데, 지금 집에서 내 회사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데다 남편이 다시 출근을 시작해야 하면 기차를 워털루에서 타야하기 때문에 둘 다 살기에는 여기가 최적의 위치여서 지금 사는 곳과 크게 멀지 않은 곳들로 집들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남편도 나도 몇 년 뒤에는 미국으로 이직을 하고 싶어서 지금 시점에 굳이 집을 사야 하나 싶긴 한데, 진짜로 이직할 수 있는지도 불투명하곸ㅋㅋ 기다리는 몇 년 동안 월세로 돈을 허공에 뿌리느니 은행에 대출을 갚는 게 낫지 싶다..

백수 마지막 날이라고 남편이 베리 특집 팬케익을 만들어 주었다 :)

    그토록 바라던 홀리데이를 한 달 동안 원 없이 즐기는 동안은 노는 것도 이젠 지겨우니 그냥 출근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미쳤었나보다 ㅋㅋㅋㅋ 내일 눈뜨면 출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고여.. 먹고 노는 게 적성에도 맞고 재능도 있는 것 같은데여.... 부디 첫날 많이 헤매지 말고 얼른 적응해서 밥값 하는 동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면 좋겠다^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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