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시한 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환 Apr 26. 2024

라면을 끓이다

이른 아침

라면을 끓인다


물이 끓기 전에

힘주어 봉지를 뜯고

계란과 파를 꺼낸다


오늘 하루

허기를 결판 내리라

생사에 결연하게

맞서서

무디어진 날을 세운다


파르스름한 빛 속에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파 한쪽을 뉘어놓고

인생이란 고단함도

같이 썰어봄 짐 하다


무엇을 썰어야 할까

한참을 망설이던

남자는 옷 섬을 풀어헤친다


두 번째 늑간즘

칼끝을 집어넣고

채 몸에서 떨어지지 않은

홀애비의 군둥한 서글품을

끄집어낸다


손목에 힘을 주자

서걱 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친다

그리움이란 게 조그맣게

도마 위에 떨어진다


왜 그런지

눈이 퀭하고

심장이 뛴다

더 이상 무엇이든

베어낼 용기가 없다


냉동실에

얼어붙은 삼겹살처럼

아픔인지 기쁨인지

슬픈 건지 후련한지도 모를

다 들러붙은 덩어리였다


아직도

세상은

두렵고

부끄럽고


차마 썰어내지 못할

것들이 인생에

어디 한 곳뿐일까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남자의

딸꾹질 소리가

냄비 속에서

들려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벚꽃엔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