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탁에 모처럼 도라지 오이무침이 나왔다. 어릴 적 심심치 않게 올라오던 반찬이건만, 도라지가 귀한 시절이 되어 그리 손쉽지만은 않은 찬이란 걸 알고 있다.
반찬가게에서 사면 한 접시도 안 되는 것이 오천 원씩이나 하니 알뜰한 아내는 손수 장을 보아서 만든 게다. 맞벌이를 하는 아내는 뭐하나 반찬을 할라 치면, 특히 제철 나물이나 음식일 경우는 부러 장을 보아 음식을 무치고 조리하고 끼니에 늦지 않게 내놓기가 번잡스럽고 여간 고육한 노동이 아닐 텐데도 그 정성이 고맙기만 하다. 초등 입맛인 내게 손쉽게 소시지나 부쳐주면 좋다고 잘 먹을 걸 알면서도 한 예쁜 짓이다.
40이 넘어 한 늦은 결혼인지라 시부모 다 돌아가신 후이니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고 시집살이는 당신이 시킨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얘길 하다가 도라지 무침이 예전 생일상에 꼭 나왔었던 같다는 얘길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밥상머리에 올린 도라지무침을 한 젓가락 들어 우적우적 먹다가 내 입가에 번지는 웃음에, 맛이 좋아 그런 줄 알고 아내는 기분이 좋은지 자신의 솜씨를 공치사하기 시작한다. 예전 어머니의 맛이 아니라서일까. 아삭하고 매콤하고 시큼한 도라지의 맛을 지금은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그냥 무덤덤한 것을 애써 내색하지 못했다.
사실인즉 도라지는 어머니를 머릿속으로 퍼 올리는 마중물 같은 존재인데, 이걸 얘기해 말아 고민인 것을…. 입에 넣어도 좋을 추억이지만, 생전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 볼 때마다 웃는 것을 아내는 알 턱이 없다.
지금 미인의 조건은 강 건너 압구정 어디에서 찍어 나온 갸름하고 날렵한 턱선을 자랑하는 강남 미인이 대세가 아닌가, 강남미인 스타일 말이다.
그 예전 어릴 적 어르신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자고로 여자는 복스럽고 몸집이 있고 동글동글한 얼굴을 최고로 치셨다. 황신혜는 그저 불여우 상이요 박복한 관상이고, 강부자 선생님 같은(요즘은 개그우먼 김민경 정도일까?) 얼굴이 맏며느릿감이요, 복 있는 얼굴이라 좋다 하셨다.
어머니와 TV를 같이 보다 보면 하관이 좁고 박복한 수많은 여인네를 보시고 혀를 끌끌 차셨다.
“저거 저거 산에 도라지 캐러 가게 생겼다.”
내가 보기에는 예쁘고 도회적이고 세련된 미인들인데 어이도 없고 왜 그리 웃음이 나던지….
혹 가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다 간 후에도 어디 누가 공부를 잘하는지 집이 어디 사는지 이런 건 묻지 않으시고 누구 아무개는 얼굴이 산에 도라지 캐러 가게 생겼더구나 하시고 어김없는 감평을 해주셨다.
그 도라지 캐러 간다는 표현의 정확한 명칭은 약초를 캐는 외발괭이란 걸 후에야 알았지만, 지금껏 도라지 소리만 들어도 히죽거리는 버릇은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이 되었다. 환갑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님은 계속 맘속에 한스럽고 가슴 저린 기억들만 남아있기에, 도라지 소리에 기분 좋아지는 즐거운 추억이 남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지라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유품들을 정리하며 남기신 것들은 일상의 그대로였던 생활용품과 옷가지였다. 그 물건들이 어떤 의미인지 남은 자식들과 남편인 아버지도 알지 못했다. 뚱뚱하신 체격에 이리저리 당신 몸에 맞추어 손수 수선한 옷들이 옷장에 가득 있었으나 하나하나 다 어머님 체취가 묻어난 것들이 별 효용이 없어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49재가 끝날 즈음에야 치웠다. 장롱 서랍에 한가득 고이 접어놓으신 이런 저런 비닐들과 채 입지도 못하시고 포장째 놓인 양말과 속옷들 여기저기 많이도 모셔만 둔 헌 상품이 된 새 제품들이 괜히 쩡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나마 남겨놓으신 유품 중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들은 화분들이었다.
체격은 아니 그래 보이시나 나물 반찬을 유독 좋아하시고 화초들을 많이도 아끼신 터라 철마다 분갈이를 하느라 마당에 쪼그리고 앉으셔서 흙을 만지시던 모습이 선하다. 학교를 마치고 들어서면 마침 잘 왔다고 반기시며 이 화분은 저리 저 화분은 이리 옮기라 말씀하시곤 하였다. 지금 집에 몇 개 두어둔 자잘한 화분을 보면서 그 중 10년을 훨씬 넘게 키운 소철과 고무나무를 잘 간수할 걸 하는 아쉬움도 든다.
교회를 다니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 성탄절 즈음 트리를 만들자면 전나무나 소나무가 필요하다 하니, 어머니는 여기 이 나무가 크니 여기다 트리를 장식하라며 고무나무를 가리키셨다. 어린 마음에도 이 나무는 아닌데, 하며 떼를 쓰다가도 하나 둘씩 형제들끼리 장식을 하다 보면 소나무인지 전나무인지 중요치 않고 엉성해도 내가 손수 했다는 대견함이 넓적한 고무나무 잎사귀 사이사이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빛나 보이던 시절이었다.
며칠 전에 지방에 사는 누이가 실난을 한 화분 가져다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은 딸들이 더 깊기 마련인지 생전에 당신이 키우시던 걸 20여년을 키워서 여러 화분을 만들어 놓았다. 그 중 하나를 어머니 생각하라며 가져다 준 것이다. 나는 그 큰 화분들을 죄다 죽이고 버렸건만 짠하기도 하고, 내가 미처 지켜내지 못한 것을 20여년 지키느라 애썼을 정성을 생각하니 너무나 고맙다.
누이를 본 김에 예전 고무나무와 도라지 캐러 간다는 어머니 말 기억하냐고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누이도 자지러진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난다 하며 웃다가 그새 울먹이다 웃다가 도라지 얘기, 어머니 얘길 괜히 꺼냈는지 나는 머쓱해졌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산이 고작 도라지와 실난뿐이니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시시한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도라지의 추억과 누이가 두고 간 실난이 그 시절 몽그라지게 아쉬운 어머니의 살 내음과 사랑이 담겨져 있기에 너무도 감사하고 아련하다. 지갑 속 몰래 꾸겨놓은 5만 원짜리 비상금 마냥 든든하기까지 하다.
올 여름 꽃대가 올라오고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한여름 기일에 어머님이 다시 오신 듯 만개하길 내심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