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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와 같이 사라진 사람들

by 승환

“어찌 잘 지내나 코로나 때문에 작년도 올해도 서울에 한 번 올라가기가 쉽지 않네그려” 토요일 점심쯤 반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이런저런 중년 남자들의 시답지 않은 수다가 30분이 훌쩍 넘어 버렸다.

4월이면 한참 뜸하다가도 어김없이 경민이 형님이 연락을 주신다. 식사라도 하자는 말씀과 올해같이 보기 힘들더라도 전화를 먼저 주시곤 한다.

매해 대전에서 힘들게 서울까지 오셔서 식사를 같이하던, 차를 또는 술을 같이 하시곤 하였는데 올해같이 부득이 볼수 없을지라도 전화를 먼저 주시니 손아랫사람으로 자책과 민망함이 매해 반복된다.

그냥 올라오시나 보다 했던 경민형의 4월 서울 나들이는 부로 확인차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몇 해 전 페이스북의 지난 스토리에 올라오는 병철이 사진을 보고 알게 되었다.

한강공원 잔디밭에 앉아 성산대교를 배경으로 맥주캔을 들고 있는 익숙한 얼굴, 병철이 형 때문일 것이다.

병철이 형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0여 년 전 음악카페 모임에서 화곡동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를 할 때였다. 인터넷 음악방송을 개인 서버에서 스트리밍으로 하는 카페였던 곳이었고 재즈와 기타 여러 장르를 다루었던 곳이었다 나이가 어린 축에 들었던 내가 고기를 한참 열심히 굽고 있는데 웬 사람이 와서 반말로 이렇게 하면 탄다는 둥 어쩐다는 둥 훈장질을 하는게 아닌가? 초면인데 반말 비스므레 하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8살 연상이었고(미혼이라 그랬나 많이 동안이었다) 국내 몇 개 안 되는 재즈카페 중 가장 큰 곳의 카페지기였던 병철이 형이었다. 모임의 카페지기와 병철 형이 개인적 친분이 있어 같이 동석을 하였기에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음악적 지식이 남달랐던 사람인지라 나이 어린 내겐 어릴 적 라디오 디제이인 전영혁을 우러러보던 마음 같이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되었고 영 취향도 아니었던 재즈 카페에 가입을 하게 되었다.

70년대생 남자들은 그나마 뺵판이라는 해적판의 수입 음반도 접해도 보고 형이나 삼촌들이 듣던 팝송이 귀에 익은 세대였고 특히나 헤비메탈과 락의 전성시대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나 역시 헤비메탈광이었지 재즈는 전혀 아니올시다 였다.

수사반장드라마에 단골로 보여주는 쎅스폰이나 트럼펫같이 밤무대에서나 듣고 춤바람과 제비족이 연상 되었고 그랬던 재즈는 그 이후 20대 초에 비싸서 가보지는 못하는 재즈바에서 들려오는 음악 정도랄까 내하고는 전혀 다른 결의 음악이라고 생각했고 쳐다보지도 안했다.

어찌 되었건 재즈카페를 가입하고 결혼 전 까지 꽤 많은 시간을 놀러 다니고 술도 먹고 공연도 보고 그 곳에서 경민이 형이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까지 주로 구성이 된 모임이었고 그런 여가나 취미활동을 할 수있는건 아무래도 싱글인 경우가 많았다. 그냥 싱글이었던지 속칭 갔다고 오셨던지 ...

비혼이나 만혼이 시작되어가는 사회적 분위기였고 결혼을 30전후에 하지 못하면 거의 싱글로 가는 수순이랄까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기혼자들 친구 모임에서 섞이지 못하고 기혼자들은 친구나 취미를 찾는 일을 할 여유가 없어지고 누구의 의도가 아닌 자연스럽게 싱글들끼리 모임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재즈카페의 분위기는 편하고 좋았던 것 같다. 재즈의 마이너한 느낌과 부담 없음이 좋았고 그렇게 지루하던 팻 맨시니나 빌 에반스도 귀에 익숙해지고 큰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 세계적인 그룹들이나 뮤지션들의 음악을 바로 눈앞에서 접할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홍대의 에반스나 기타 작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재즈 뮤지션들이 무척 고급인력이었기에 학교의 교수나 유학파 실력자들마저도…. 그들에겐 불행이지만 재즈 신이 너무 작기에 우리들에게는 너무 큰 축복이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되면 홍대 앞에 널린 소극장 공연을 보고 음감회를 하고 봄에는 잠실로 서울 재즈페스티발을 가고 가을철이 되면 자라섬으로 재즈페스티발을 가고 여행을 하고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와인을 준비하여 집으로 초대하고 커피와 차를 좋아 하는 사람은 집으로 초대하여 커피와 차를 내어주고 음반과 오디오를 수집하고 교환하고 무엇인가 매개체가 있어 사람들과의 소통이 늙지도 못하고 젋지도 않은 나이 대의 우리에게 서로 서로 위안과 행복을 주었던 것 같다.

조금은 깐깐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실제 친해지고 나면 믿음이 가는 성격인지라 주위에 항상 사람들이 병철이 형을 중심으로 모이고 합정동의 병철형 네는 아지트랄까 중년 남녀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철이 형님이 소식이 끊어졌었다.

전활 받지 않고 집에도 사람이 없고 가을 좀 끊긴 연락은 혹시 외국으로 가서 어디 계신게 아닐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 중에 겨울이 지나 봄쯤 지방의 어는 산속 요양원에 계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 가시는 얼굴 볼 사람들은 시간이 없으니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닥 폭음을 하시는 스타일도 아닌데 간암으로 확진을 받을 때 벌써 말기였다고 한다. 6개월의 투병 생활 중에 끝내 앙상한 마지막 모습으로 침상에서 뵙게 되었다.

그렇게 가신 달이 4월이었다. 그렇게 우린 우리의 청춘을 같이 보내드렸다.

더 이상 재즈도 음악도 사람도 없이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 속에 사진 속 시크한 얼굴만 추억으로 남았다. 장례가 끝나고 그분을 추모하며 음감회와 모임을 한번 가지고 그 다음 해에 한 번의 더 모임을 하고 서서히 병철이 형은 잊혀 갔다. 카페지기는 병철 형 후임으로 퀸팬클럽 회장을 하며 신촌에서 음악바를 하는 조금 젊은 편이 판준이 되었고 남아 있던 중년의 회원들은 뿔뿔이 구심점이 없어지고 밀려가게 되었다.

경민 형님이 4월의 전화와 상경은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경민형은 술을 끊었고 부지런히 제주를 걷고 온종일 차에 심취하여 마셨고 나는 결혼으로 또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그 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이름이 가물해진 이들도 있고 친했지만 소원해지고 알콜중독이된 어렸던 여자아이도, 마약에 손을 대고 불행해진 이도 소식을 듣는다. 그렇게 친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소식이 신문에난 먼 지방의 기삿거리인듯 데면데면해졌다.

같이 했던 다른 이들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마음속 갈무리하며 지키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그렇게 사람들의 인연과 시간은 덧없고 흘러간다.

그 끈을 놓지 않고 가느다란 실타래의 끝을 경민형과 나는 서로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이 남기고픈 나이가 되었다.

사진도 추억도 모두 남아 있는 자들의 것이다. 서로가 기억하는 일들이 같지 못해 당혹스럽기도 서로 멀리 떨어져 걸었기에 공유할 것들이 점점 작아져만 간다. 그래도 때때로 확인하는 목소리와 얼굴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인연인 듯하여 그저 감사할 뿐이다.

4월은 봄과 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서로에게 많을 것만 같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또 한 번의 계절이 바뀌고 경민형의 가을을 만나러 대전으로 마음만이라도 먼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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