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오늘은 올 가을 들어 가장 온도가 내려간다는 뉴스다. 가을 추위가 추우면 얼마나 추울까 염려를 내려놓는다. 며칠 동안 아픈 다리가 괜찮아 관절약을 먹지 않고 견뎌 봤으나 어제저녁부터 통증이 또 온다. 그냥 병원과 친구 하라고 하나 보다 싶어 아침나절 바쁘게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거리에 나서니 얼굴에 닿는 공기가 차갑다.
'움켜쥔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빠져나간다'라는 이재무 시인의 말에 공감이 간다. 정말 시간이 이리 빨리 흘러가는지 괜스레 마음 한편도 시려 온다. 병원에 오니 아침 일찍이라서 그런지 물리 치료실이 밀리지 않아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어 시간은 버리지 않아 좋다. 얼마나 많은 날 병원을 다니며 살아가야 할까.
나이 듦이란 이토록 이곳저곳 아픔이 찾아온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몸이 아프면 마음도 따라 아프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머리는 쪽지고 어젯밤 다림질해 놓은 한복을 입는다. 서둘러 남편 차를 타고 옥정리 재복시인님 댁으로 간다. 선생님 댁은 시내에서 10분 거리 남짓한데 조용하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마냥 포근하고 멋진 전원주택이다. 정말 시인의 공간답게 자연과 잘 어우러진 곳이라서 혼자서 사색하며 글 쓰기 좋은 환경이다. 집안 마당 잔디 손질이며 입구까지 깔끔하게 정리를 해 놓아 손님을 환대하는 집주인의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시인님의 전원 주택 모습과 집안 넓은 공간에서 시 낭송과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
며칠 전, 시인님에게 손님이 대전에서 오신다고 찻자리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선생님과의 관계를 생각한들 어찌 거절을 하랴, 기쁜 마음으로 허락을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서 밤이면 어떻게 할까? 혼자 궁리를 한다. 찻자리란 차를 마시는 행위의 공간이지만 사실은 차와 함께 하는 예술적 미적 표현이기도 하다. 차 마시는 는 건 쉽지만 찻자리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는 쉽지 않다.
마음 쓰이는 일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살아야 사람 사는 맛이다. 혼자만 간직한다면 아무리 좋은 물건도 좋은 생각도 사장되고 마는 것이다. 행사 전날 무거운 짐을 옮겨 세팅을 해 놓았다. 그런 후 모자란 소품은 다시 챙긴다. 나는 찻자리만 보아도 기운이 난다. 보이차, 발효차, 연차 세 가지 차를 내기로 했다.
차에 따라 차 도구가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챙겨야 할 차 도구가 많다. 하지만 차 도구 소품하나도 내 손길과 함께 해온 묵은 세월이다. 아무리 생명이 없는 물건들이지만 나와 호흡하면서 같이 해온 차 도구가 정겹다. 어느 물건이든 세월은 그 사람의 역사이며 삶의 흔적이며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차가운 날이면 따끈한 보이차나 발효차가 마시기 좋다. 작은 유리포트에 촛불을 켜 놓고 차를 우려 촛불 위 유리 다관에 차를 우려 올려놓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함을 느낀다. 발효차도 봄에 지리산 하동에서 찻잎을 사다가 집에서 내가 손수 만든 발효차다. 그런 만큼 맛도 각별하다.
대전에서 손님들이 도착을 하고 우리 한시예 회원님들도 도착을 해서 서로 인사를 하고 차도 마시고 훈훈해진다. 대전에서 독서 모임과 글 쓰기를 꾸준히 해 오며 인문학 강의를 하신다는 분은 군인 준장으로 전역을 하셨다 한다. 군인 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책 읽기를 권장하며 인문학 강의를 많이 하셨다는 분은 말씀도 잘하신다. 결국 인문학은 사랑이라는 말로 종결이 된다라고 하신다.
시를 낭송하고 얼마 전 재복 시인님의 출간시집 '시발' 시를 골라 낭독하면서 시를 쓰신 연유를 듣기도 하고 참 멋진 시간이었다. 깊어가는 가을 시가 있고 사랑이 있고 또한 차가 있고 멋진 가을날이었다. 헤어지기 섭섭하여 앞마당 잔디 위에서 모두 모여 사진도 찍고 석별의 정을 나누면 헤어진다.
손에는 정이 담뿍 담긴 선물까지 시인님의 넉넉 한 마음이 이리 훈훈하고 좋을 수가 없다. 손님을 초대한다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다. 지금처럼 삭막한 세상에 마음하나 더 하는 따뜻해 온다. 글과 시와 마음을 나누는 오늘, 모든 분들이 가을의 추억 한 자락 가슴에 담고 하루해가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