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 아무말32
어째서 다섯 시 오십삼분에 눈을 뜨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더 자도 되는데, 분명 더 자고 싶은데 그때만 되면 눈이 떠진다. 오늘도 물리치료 외엔 일정이 없는 금요일이다. 일찍 일어나지 않겠다고 늦게까지 버티다 잠들었는데 허무하게시리.
지난주 금요일에도 이놈의 '일찍도착해야마음편함'병이 도져서 예약이 11시인데 10시 30분에 도착하는 바람에 차에서 10분, 나가서 5분, 들어가서 25분을 기다렸다. 앞 환자가 늦어져 지연이 된 거랬다. 이번 주엔 같은 허튼짓을 하지 말자고 꾹꾹 참고 참다가 출발했는데도 20분을 일찍 도착했다. 병 고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담당 피지오(물리치료사)에게 내 통증을 설명했다. 의자에 앉으면 "feels like there's no meat but bones only" 같다고. 엉덩이에 넉넉한 지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 자세에서는 왼쪽 엉덩이 뼈가 그대로 딱딱한 바닥에 닿는 것처럼 아프다. 그렇게 된 지 벌써 5개월째다. 또 척수신경의 문제인가 싶어서 비싼 돈 들여 MRI까지 찍었지만 큰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상 없음 소견에 호주 영상 의학계를 의심했다. 이 사람들 이거 영 사짜 아니야 이거? 뭐 전문의가 아니라는데 더 개겨볼 재간이 없어서 원인 모를 이 통증을 인내하는 중이었다. 우울이 내 디폴트이듯 이젠 이 통증도 디폴트가 된 것 같았다. 마음의 병과 신체의 병이 대통합을 이루며 숙주의 본체를 야곰야곰 갉아먹고 있던 중에 지금의 피지오를 만났다. 그는 내게 한줄기 희망, 구원의 빛과 같은 말씀을 내리셨다. 단단하게 뭉쳐진 Root cause 근육을 찾아서 이완시켜주면 통증이 나아질 수 있다고. 오 주여, 그럴 수만 있다면 제가 무엇이든 하겠사옵니다의 심정으로 아파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의 매뉴얼 핸들링 스킬을 시전 하는 피지오와 30분을 보냈다. 억, 컥, 헉, 악 외마디 비명으로 꽉 채운 30분이었다. 다리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집에 오는 길에 맥주 두병과 과자를 샀다. 한 병만 사자고 들어갔는데 막상 맥주병을 보니 너무 작았다. 언제부터 맥주가 이렇게 작아졌나... 내 마음이 오목해져서 그런 건가... 하면서 두병을 집었다. 합리적이었다. 과자는 대충 바삭한 걸로 골랐다. 아침에 본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넌 널 위해 뭘 하냐"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는 시원한 맥주와 바삭한 과자를 사멕였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지난 일주일 아픈 엉덩이를 부여잡고 참 열심히 살았다. 내 안의 사이코패스가 발현되어 자칫 범법자가 될 뻔 한 위기를 여러 번 넘겼다. 분노해봤자 손해는 또 나만 보는 일이니 그러지 말자고 다스리고 다독였다. 출근할 때마다 랩탑을 숨기는 게 자연스러워진 것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지만 범법자가 되지 않으려면 별 수 없었다. 랩탑마저 뺏기고 나면 내 인간으로서의 격을 버리고 끝내 넘어선 안될 사회의 규칙을 넘어버릴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남은 건 병약한 몸뚱이와 나약한 정신상태뿐인 와중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만큼은 지켜내는 중이다. 아주 크게 칭찬받아야 한다. 한마디로 술을 마실 만했다는 말을 또 길게 했다.
과자와 맥주을 마시다가 주객이 전도되어 두병을 마시려던 맥주는 한 병에서 그만두었고 여러 번에 나누어 먹으려던 과자는 [앉은자리한봉순삭스킬]을 발휘하여 남김없이 먹었다. 남은 것은 상처 난 연구개뿐이다. 얼마나 바삭했던지 오후 내내 긁힌 입천장이 아팠다. 당분간 과자는 부드러운 걸로만 먹어야겠다. 홈런볼이랄지 사또밥이랄지... 그런데 사또밥이 아직도 실존하는가 모르겠다. 아 라떼 이즈 홀스, 사또밥을 밥그릇에 담아서 밥처럼 퍼먹겠다고 우기는 어린이도 있었다. 그 어린이는 이제 사또밥뿐만 아니라 온갖 밥을 국그릇에 담아 국처럼 퍼먹는 어른이 되었다. 반성하고 밥은 밥그릇에 먹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