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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리다 Apr 28. 2022

에필로그: 물성에 기대 쓴 에세이

무슨 말이든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에필로그다. 이게 연재였느냐고 물으신다면,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그만하는 거냐고 물으신다면, 아뇨 그건 아닙니다. 일단 지금까지 쓴 건 에세이라고 해 두자. 5월에는 많이 바쁠 것 같으니, 지금은 이 에세이 시리즈의 마침표를 미리 찍어 두겠다. 그리고 한 달만 놀아야지.

    돌아올 땐 소설을 들고 왔으면 한다. 이상 공지 끝.




정상성을 착실히 점유해 온 인생이었다. 나는 생애주기마다 시스젠더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 수도권 거주, 대졸, 기혼, 정규직이라는 타이틀을 착실히 따 냈다. 내가 그것들 각각에 딱 들어맞는 사람인지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은 되게 중요한 거였는데 말이지. 나는 그냥 다들 그렇게 한다고 믿었다.

    세계는 엉망이고, 나한테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따낸 타이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주범이었다. 우리는 여성과 소수자를 죽이고, 장애인을 유폐하고, 지방을 식민화하고, 학벌을 기반으로 한 위계를 공고히하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신화화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모든 걸 먹어 치우려 하면서도 한 톨도 남과 나누려 하지 않는 소인배들. 그런 주제에 떠드는 건 또 왜 그렇게 멈출 줄 모르는지.

    그중 내 입 하나 다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주자, 그래서 ‘저들’이 자신의 존엄을 쟁취하게 하자, 하며 스스로를 설득하는 건 간단한 일이니까. 나는 오래오래 입을 닥쳤다.

    기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걸 은폐하는 기만. 세계가 저절로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내가 이미 따낸 타이틀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낙담에 기대 안온함을 누렸다. 이대로라면 영락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지옥을 성실히 건설하는 동료들과 함께. 나는 그걸 안다.

    이제라도 안 그러려면 무얼 해야 하지? 한번 생각을 해 보자.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빼고. 그건 기만의 연장이니까.

    나와 함께 지옥을 건설하던 자들에게 말을 건네자. 야 이 새끼들아, 하고.

    근데 아무 말도 안 하면서 한동안 살았더니, 이제 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다 쓰잘 데 없는 말인 것 같았다. 역시 입을 닥치는 편이 낫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우선 세계의 물성에 슬쩍 기대 보기로 했다. 뭐라도 다시 쓰고, 말하고 싶어서.

    애플워치 같은, 줌페가수스38 같은, 나보다 훨씬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들에게 업혀 보기로 했다. 좀 겸연쩍어도 말이다. 그런 걸 소재로 써 보니, 이야, 좋더라고. 캠핑 가서 잘 타는 장작으로 불 피우면 이런 느낌인가 싶게. 글이 막 활활 써 졌다.

    한 10번 해 보니 이젠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것도 쓰고 싶어졌다. 나와 함께 지옥을 건설하던 옛 친구들도 좀 조지고 싶고 말이다.

    아무튼.

    나 너머에 세계가 있다. 이제 그 말을 반복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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