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배운 것
2022년 4월 16일을 맞아 이걸 쓴다. 해마다 이날이면 인터넷 창을 열어 ‘세월호’를 검색한다. 지난 1년간 이 참사에 대해 더 밝혀진 게 뭔지, 유가족 및 생존자 분들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찾아본다. 몇 년 전까지는 그중 몇몇 분에게 연락을 드리고는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 나는 머뭇댄다. 내가 부끄러워서.
침몰로부터 8년이 지나 2022년에 이르렀다. “잊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세월호를 언급할 때 흔히 따라붙는 이 말, 나 역시 수없이 뱉어 온 그 말은, 결연함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잊지 않는다는 게 뭔지, 끝이 의미하는 게 뭔지를, 나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오늘까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는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회적 차원에서 조사가 세 번이나(특조위, 선조위, 사참위) 진행됐는데, 뭘 더 밝혀야 한다는 거야?”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 역시 나만큼이나 업데이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게 분명하다.
내 감각은 대부분 침몰 당시(2014년)와 1주년 광화문 집회(2015년), 선체조사위원회 활동기(2017-2018년)에 머물러 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참사를 둘러싼 지형과 온도가 매일 어떻게 바뀌는지를 피부로 느꼈다.
참사 직후에 유가족, 미수습자 가족, 생존자들은 모두 적대적인 사회 환경에 노출된 채였다. 국가는 그들을 탄압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순수성을 캐물었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떠나보내고, 삶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그들은 맨몸으로 그 거대한 적대를 받아 내는 중이었다. 이것이 정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고 그들을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이 보는 곳을 바라보고, 그들이 가는 곳으로 갔고, 그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함께 외쳤다. 세월호를 인양하라, 박근혜는 퇴진하라.
그때 내 삶은 운동, 그러니까 일종의 무브먼트와 맞닿아 있었다. 내게는 동료가 있었고, 며칠마다 써야 할 성명서와 기도문이 있었고, 참여할 집회가 있었고, 만나고 연대하고 설득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관철시켜야 할 요구가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몇 번씩 생각하곤 했다.
세월호 참사에 휘말린 사람들을 비롯해 이 사회 곳곳에는 죽어 가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 재개발 정책과 토건 자본에 철거당하고 쫓겨나는 사람들, 선거철마다 각 집단의 내부 결속을 다지려는 자들이 내뱉는 차별과 혐오에 난도질 당하는 성소수자들, 유리천장에 짓눌리고 살해와 성 착취로 내몰리는 여성들, 시설에 갇히고 편견에 내밀려 사회에서 축출당한 장애인들을, 나는 만났다. 그들은 저마다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나 역시 그들 중 하나라는 걸, 나는 곧 깨달았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4년 여가 지날 무렵 내 에너지는 거의 고갈됐다. 그놈의 먹고사니즘이 또 나를 이겼다. 전직 대통령인 박근혜 씨가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대표하던 ‘촛불 정권' 역시 5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을 앞둔 2022년 4월 16일에 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8년이 지났고, 유가족들은 아직도 거리에 있다고. 이게 적확한 표현인지조차 확신하지는 못하는 채로 말이다.
적의와 혐오의 타깃이 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칫하면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은 지척에 다가온 죽음을 의식하게 한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려움이 밀려온다. 달리 뒷배가 없는 사람이라면 최대한 안전을 도모하며 어디로든 숨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조차 성공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해도.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 역시 그렇게 했다. 그건 세월호와 별로 상관이 없지만 또한 연결되어 있다.
목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한 발을 개신교계에 담근 채다. 직장이 그와 관련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바닥은 내가 정말로 옳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 대체로 적대적이다. 혐오의 선봉, 자본의 첨병, 정상성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들이 곳곳에서 눈을 시퍼렇게 빛낸다. 그들은 힘과 돈도 갖고 있다. 그러니 조심하며 입을 다물고 있지 않으면 그들에게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 나는 그게 솔직히 많이 두렵다.
그건 그들 안에 가득해 넘실대는 혐오 때문이다. 그들은 그게 옳다고, 신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혐오는 언제나 범람할 준비가 돼 있다.
아직 목사가 되려는 생각을 그만 두지 않았을 때 나는 목사 고시, 그러니까 목사 자격 시험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두 번 응시했다. 그때마다 내가 면접에서 받은 질문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였다. 당연히 젠더나 섹슈얼리티에 대한 학술적인 견해를 묻는 게 아니었다. 면접관들은 언제나 그건 죄입니다, 라고 내가 대답하기를 원했다. 성소수자 혐오의 광풍이 교단 내에 본격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였다. 건방지고 오만한 새끼들.
나는 되물었다. 그게 이 면접의 주제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고. 지금도 생각한다. 목사 후보생이 면접에서 들어야 할 질문은 대체 뭘까?
말했다시피 내 직장은 교단과 밀접한 곳이므로, 다음날부터 나는 일터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다. 너 면접에서 동성애 관련 질문에 이상하게 대답했느냐, 너도 ‘그런’ 사람이냐, 따위의. 솔직히 대꾸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다들 그게 해이트스피치이고 사상 검증이라는 걸 모른다는 듯이 굴었다. 나를 걱정하는 그들의 눈빛을 꾸역꾸역 참아 넘겼다.
그런가 하면 친한 친구들 중 몇몇은 이렇게 말했다. 그냥 눈 딱 감고 죄입니다, 라고 대답만 한번 하면 되지 않느냐고. 일단 목사가 되고 나서 잘하면 되는 것 아니냐면서.
글쎄. 뭐하러?
이건 세월호와는 너무 멀리 떨어진, 나만의 사사로운 이야기일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을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윤민석 사/곡,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나는 이 노래를 꺼내 부른다. 한때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며 부르던, 그러나 요즘에는 많이 잊힌 노래를. 그러면서 이 노래를 내게 가르쳐 준 사람들을,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진실을 인양하기 위해 8년간 분투한 그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으면, 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선 곳을 바라본다. 혐오의 얼굴을 한 신과, 그의 이름으로 소수자들을 색출하는 데 신명을 내는 자들을 본다. 그 곁에서 수치스러워하면서도 이도저도 못하는 내 꼬락서니도 본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세계와 교회를 망치고 있다. 기세등등한 죽음이 풍기는 악취가 진동한다.
자, 고전 희곡의 대사처럼 말하는 것은 그만두고 다시 생각해 보자. 나는 내 삶만 어떻게든 건사하려 드는 죄악을 그만 저지를 수 있을까? 내 삶은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다시 운동에 연결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고 말 거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티면서.
나는 두려움을 넘어, 수치를 이기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싶다. 더 많은 동료들을 만나고,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이기고, 피칠갑 된 신의 멱살을 잡아 그 얼굴을 씻길 것이다. 그게 세월호라는 참사 이후로 오늘까지 분투하는 분들에게 내가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 한에는.
내년 이맘때가 되면 다시 그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좀 더 떳떳한 모습으로 서서 말이다. 이기적인 말이지만, 버텨 주셔서 고맙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게 뭔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개를 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