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걸 잊으려고 무작정 걸었다
이 글은 바람누리길 조성 사업을 평가하거나 발자취를 되짚으려는 취지로 쓰인 것이 아니니, 혹시 관련된 자료를 찾아 들어온 이가 있다면 뒤돌아 나가시기를 바란다. 이건 그냥 바람누리길 인근에 살면서 이곳을 애용해 온 사람으로서, 추억을 기록한 토막이다.
바람누리길은 북한산성 입구에서 시작해, 창릉천을 따라 한강의 방화대교로 이어진다. 길이는 총 15.5km. 고양누리길 홈페이지의 연혁에 따르면 이 길이 2017년 7월에 조성됐다고 하는데, 이건 아마 조성 사업과 공사가 얼추 마무리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는 것 같다. 그전에도 창릉천을 따라 보행로가 이어져 있었고, 그 길로 고양시와 한강을 오가는 사람은 많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때는 포장되지 않은 길도 많았지만.
창릉천은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삼송동, 행신동을 질러 흐른다. 1기 신도시 사업 때 조성된 행신동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근 5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당연히 하천 주변의 정비도 이때쯤 이루어졌고, 사실은 요즘에도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삼송역 인근에 이르면 창릉천의 수량이 상당히 풍부한 편이다. 관리 당국에서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서 이를 유지하는 걸로 안다. 덕분에 수중 생태도 잘 유지되는 것인지 오리나 가마우지, 백로 등의 조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나는 이보다 상류로 올라가 본 적이 없어서, 그곳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다. 조만간 북한산에 오를 생각이니 오가면서 확인해 봐야겠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나는 바람누리길로 갔다. 몇 년 전까지는 거기서 자전거를 탔고, 요즘에는 주로 달린다. 자전거를 타는 날에는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 한강으로 향했고, 난지한강공원에서 라면을 하나 끓여 먹은 후에 집까지 돌아오는 게 내 패턴이었다. 온몸에 땀을 흠뻑 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생각이 단순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녹초가 되어야 생기는 용기도 있다.
한 개신교 신학대학원을 수료한 후, 나는 약 2년간 전도사 노릇을 했다. 공식적인 출근일이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뿐인 파트타이머였다. 대체로 이 단계를 거친 후에 고시를 거쳐 풀타임 목사 자격을 얻는 게 이쪽 동네의 일반적 수순이다. 다만 그동안 파트타임 전도사 급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들 부족한 생활비를 다양한 방식으로 충당하고는 한다. 나는 한 출판사에서 주중에 사무보조 겸 교정/교열을 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소위 투잡을 뛴 거다. 엄밀히 말하면 휴무일 없이 일한 거지만.. 그냥 그렇다고 하자.
다른 건 괜찮았는데, 문제는 체력이었다. 평일에는 출근하고, 토요일에는 일요일을 준비하고(흔히 ‘주일 준비'라고 부른다), 일요일에는 전도사 노릇(흔히 ‘사역’이라고 부른다) 하기를 6개월쯤 하니, 체력이 남아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피곤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뭘 때려치울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나보다 몇 년 앞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내가 완전히 번아웃된 상황이었고, 다른 길을 모색할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다른 길에는 비용이 든다. 우리는 일단 1년간 외벌이로 버티기로 했다. 아내는 일을 그만두고, 대신 전공과 관련된 공부를 시작했다. 본래 벌이는 나보다 아내가 좋았기 때문에, 내가 투잡을 한다 해서 아내가 빠진 몫을 완전히 매울 수는 없었다. 단지 그간 모은 돈을 1년간 되도록 덜 까먹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말 그대로 버티기에 들어간 거다.
나는 평일 점심시간마다 잽싸게 밥을 먹고, 출판사 3층 창고 한쪽에 방치된 침대에 드러누워 쪽잠을 잤다. 폐와 위 건강에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잠시 눈을 붙이면 오후를 보내는 게 좀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내가 점점 피곤에 익숙해져 갔다는 거다. 캬, 젊었다. 할 만하더라고. 만성 녹초로 사는 거.
매일 일과가 빡빡하니 몸이 좀 고되긴 했지만, 그런 상황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다. 내 마음을 정말로 뒤흔든 건, 목사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언제나 제법 진지한 구도자였고, 당시에는 누군가가 나를 개신교 열광주의자라 불러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깨달은 것들은 좀처럼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내 관심사는 대체로 ‘나 다운 나’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점은 내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건 나라는 사람의 빛깔이었지만, 사람들이 목사에게 요구하는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사목하는 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사목, 즉 성도를 지도하고, 돌보고, 구원의 여정으로 인도하려 애쓰는 일을 생의 1순위 과업으로 삼으며, 그 직에 순명한다. 그리고 그건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걸 어렴풋이 인식했을 때는 불안했고, 확실히 깨달은 후에는 짓눌렸다.
내가 속한 교단에서만 매년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원을 졸업한다. 반면에 교세는 점차 쪼그라들고 있었다. 다들 사역의 지속 가능성을 두고 고민하는 가운데 뒤숭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굳이 나까지 목사가 될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에 “그래도 돼야 한다.”고 답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는 사목에도 별 열심이 없으니까. 미래가 빤히 그려졌다. 이도 저도 아닌, 불행이 말이다.
경로를 바꿔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자원이 별로 없었다. 알다시피, 경로를 바꾸는 데는 비용이 든다. 돈이든, 시간이든, 정신력이든. 내 손에는 셋 다 거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뭘 포기해서 해결되는 문제라면 그렇게 하겠는데, 그것도 해결책은 아니었다. 꼼짝 못하고 이 자리에 박제된 것 같아서 몸과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흘러가? 그럴 수도 없었다.
나한테 필요한 건 용기였다. 용기가 상황을 바꿔 줄 마법은 아니었지만, 첫 발을 내딛으려면 당장 그게 필요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인정할 용기, 이건 내 길이 아니니 다른 방법을 모색할 용기, 선택에 따른 고단함을 감수할 용기, 거기에 들인 시간과 돈을 포기할 용기, 그리고 내가 목사가 될 거라고 기대해 마지않던 (나 자신을 포함한) 몇 사람을 실망시킬 용기. 그게 나한테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긴데, 그땐 마치 퇴로 없는 벼랑에 몰린 것처럼 두려웠다.
앞이 캄캄하다, 답이 없다,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웃기는 건, 그런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다는 거다. 아마 끼리끼리 모인 거겠지? 우리는 모여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지리멸렬한 대화를 하고, 답이 없다는 하소연으로 자리를 마무리하고는 했다.
어느 날이었을까. 너무 피곤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루 뺀 날이었을 거다. 마음이라도 좀 시원하게 환기하고 싶은 충동에, 창릉천을 따라 무작정 한 3시간 동안 걸었다. 한여름 대낮에 무슨 생각이었을까. 제정신이 아니던 건 확실하다. 물통 없이, 계획도 없이, 뙤약볕 아래 인적 드문 산책로로 접어들었다가, 열기 때문에 그대로 쓰러져 죽을 뻔했다. 눈앞이 핑 돌더라고.
어찌어찌 난지까지 가서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집에 돌아오니 날이 다 어두워졌는데, 마음은 이상하게 좀 밝아졌다. 무슨 대단한 경험을 해서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그랬다.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해야 할까? 그래, 그만 두고 다른 길을 찾자.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나를 너무 미워하는 것도 그만 두고, 저 환멸 나는 인간 군상들을 저주하는 것도 그만 두고 앞으로 가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실 반쯤은 포기에 가까웠단 듯하다. 어쨌든 당장 달라진 건 없었지만 그 후로 또 많은 게 바뀌었다.
봄이다. 또 살아서 한 계절을 맞았다. 예년보다 더 더워진 것 같아서 마음이 좀 스산하기는 하다. 그래도 벚꽃이 만발한 창릉천은 아름답구나. 바람누리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람도 시원하다. 나는 그럭저럭 평안하다. 어떻게 먹고살면서, 어제와는 다른 길로 가는 중이다.
오래도록 이 풍경을 보고 싶다. 지나 온 시간을 너무 미워하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