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by yangTV

“우리 엄마… 엄마 얼굴이 참 곱네.”


가족 모두가 약품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염을 하는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때, 어머니가 긴 침묵을 깨고 누워있는 외할머니를 향해 그렇게 조용히 읊조렸다. 그 말을 시작으로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촉촉이 물들어 갔다.


염하는 동안 곱게 치장한 외할머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순간 움찔했다. 몸이 경직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아,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다. 마치 외할머니에게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편히 잘 가라는 듯 조용하지만 밝게 말을 거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무도 힘에 겨워 보여, 그제야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2012년 8월, 그렇게 우리는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다.




외할머니는 어느 시골마을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 한 편의 자그마한 별채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 집은 마치 고택 같은 곳이었는데, 외할머니 집에 가려면 먼저 나무로 된 큰 대문을 열고 주인집 앞마당을 가로질러 가서는, 뒤편에 있는 작은 대문을 하나 더 열고 들어가야 했다. 외할머니가 살던 곳은 자그마한 방 한 칸에 부엌이 딸려 있는 곳이었는데, 부엌에는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와 가마솥이 있었다. 날씨가 차가워질 때면 아궁이에 군불을 땠는데, 그러면 집 옆으로 나 있는 연돌(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외할머니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내 키만 한 커다란 장독대 수십 개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 장독대를 매일같이 반질반질하게 닦았었다. 무엇보다 기억이 생생한 것은 전등도 없는 옛날 화장실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화장실에 가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나무로 지어진 높다란 화장실은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는데, 거기에는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나무로 된 발판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똥 무더기가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볼일을 다 보고 나면, 옆에 마련되어 있는 쌀겨를 들이부어야 했는데, 밤이 되면 꼭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외할머니 집에서 잘 때면 혹시나 밤에 확장실을 가야 할까 봐 무척이나 걱정했었다.


외할머니 집에는 너무도 많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여름에는 마당 건너편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등목을 했고, 날씨가 좋을 때는 가끔 외삼촌과 같이 기와집 지붕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일광욕을 하기도 했다. 주인집 아이와 같이 마당에 있던 오래된 소나무를 기어 올라가기도 했고, 구석에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창고에 들어가 전통혼례 때나 쓰던 낡은 가마를 타고 놀기도 했었다.


외할머니는 거의 평생을 그 집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여러 번 우리 집으로 모시려 했는데, 외할머니는 절대 그 집을 떠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런 외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내가 대학교 2학년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외할머니는 치매였다.


우리 집에 온 외할머니는 낯선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치매 때문인지, 거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온종일 예전 집에서 가져온 작은 텔레비전을 보거나 벽을 바라보고 있었고, 간간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가끔 방문을 열고 거실에 나와 앉아 있기도 했는데,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외할머니만 마치 외딴섬에 있는 것 같았다.


치매 환자와 같이 생활하는 많은 가정에서 그러하듯,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다혈질인 아버지와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인가는 화가 난 아버지가 분에 못 이겨 외할머니가 예전에 살던 집에서 소중히 가지고 온 텔레비전을 방바닥에 던져 버려서 큰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아버지 말로는 외할머니가 자꾸만 자식들 욕을 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 외할머니였지만, 나에게만은 예외였던 것 같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면서도 손자에 대한 애정만은 기억하고 계셨는지, 대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외할머니는 내 곁으로 다가와서 조용히 앉아 계시는 일이 많았다. 가끔 외할머니의 손을 잡아 드리기도 하고, 말동무를 해주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외할머니에게 너무 미안하다. 왜 좀 더 따뜻하게 안아 주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을까? 무뚝뚝했던 나는, 마음과는 다르게 그러질 못했다.


결국 외할머니는 우리와 즐거운 추억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 보지 못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모네 집으로 옮겨야 했다. 외할머니 일로 아버지와의 다툼이 점점 심해진 어머니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모네 집으로 옮긴 외할머니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모와 함께 살다가 조용히 돌아가셨다.


문득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죽으면 저승에 간다고 하는데, 정말 저승이 있는지 난 모른다. 그래서, 저승에 간 외할머니가 하늘 위에서 남겨진 우리를 보고 마음 아파할지 어떨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승에 남겨진 우리들은 너무도 그리워서 마음이 무척 아플 것이라는 걸… 고단한 삶에 치여 가끔 잊고 살지도 모르지만,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송곳에 찔린 부푼 풍선처럼 순식간에 터져버릴 것이라는 걸…


내가 그리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이모 때문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이모는 갑자기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자신이 꼭 갖고 싶다고 했다. 이모의 그 말에 우리들 중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간절한 눈빛 때문이었다. 이모는 그렇게 얻은 영정사진을 소중히 가슴에 품고 돌아갔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때 이모는 왜 영정사진을 자신이 갖겠다고 했을까? 그동안 누구보다 가장 힘들었던 이가 이모일 텐데. 아마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고생도 많이 했을 텐데. 보통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다면 보기조차 싫은 것이 정상 아닌가?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결코 아니었다. 외할머니를 떠나보낸 이모는 너무나 힘들어했다. 외로움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난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것은 분명하다. 이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니까.


이렇게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너무나 크고, 남겨진 이는 그 큰 그리움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것이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나 괴로운 ‘이별’이라는 놈을 어머니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꿋꿋하게 버텨냈다. 부모를 잃는다는 것을 잠시 잠깐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렇게나 견딜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어머니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우리가 불편하지는 않은지, 밥은 먹었는지, 혹시나 힘들지는 않은지 걱정하고 또 걱정하기만 했다.


괴로웠을 것인데..

울부짖고 싶었을 것인데…


행복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 싶은 어머니의 험난한 삶 속에서, 외할머니는 분명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인데… 견디는 것이 버릇이 된 것일까? 맏이라는 책임감 때문일까?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슬픔을 참고 있어야 했을 어머니가 지금 이 순간 너무도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떠나보내던 그때, 엄마 얼굴이 참 곱다고 말하던 어머니의 말이 오랫동안 내 귓가를 떠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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