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뒀다 뭐해?
당당히 나를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①
“혹시, 깎아 줄 수 있어요?”
내가 매장 카운터에서 물건값을 계산할 때, 항상 빼놓지 않고 점원에게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말을 할 때면, 아내는 기겁을 하면서 창피하니까 제발 하지 말라고 나를 극구 말리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마치 나와 일행이 아닌 것처럼 저만치 도망가고는 했다. 뭐, 한편으로는 아내의 그런 반응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의례히 물건값을 흥정하는 시장에서만 아니라, 정액제인 의류매장이나 가전매장, 심지어 백화점에서도 난 꼭 이 말을 하고는 했으니까.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데는 몰라도 백화점에서까지 그러는 것은 조금 심하다 싶기도 했겠지.
이처럼 아내는 내 행동을 무척이나 창피하게 여기지만, 나도 무턱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나만의 깊은 철학(?)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점원에게 “깎아주세요”라는 말을 할 때는 반드시 이런 식으로 한다. 먼저 입가에 착하고 선한 미소를 띠고는, 매우 장난스럽고도 무심하게 툭 던지듯이 말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바로 ‘장난스럽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고? 그래야 점원이 내 요구에 쉽게 거절할 수 있을 테니까.
어떤 관계가 되었든, 권리만 주장할 수 있는 관계는 없다고 믿는다. 내게 만약 물건값을 깎아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점원에게도 그것을 정당히 거절할 권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상대에게 절대 무리하게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혹 누군가는 깎아 달라는 말 자체가 강요로 들릴 수 있다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의도는 그것이 절대 아니다. 단지, 내가 몰라서 받지 못한 권리가 혹시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의미일 뿐이다. 때문에 상대가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항상 장난처럼 얘기했고, 방법이 없다고 답하면 “아~ 그래요?” 하고 바로 수긍해 버렸다. 즉, 말을 하기는 했지만, 나 또한 뭔가 큰 기대와 의도를 갖고 했던 말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언제나 당당하게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했던 이 한마디 말이 가져온 변화는 컸다.
대부분의 경우, “죄송합니다. 해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네요.”라는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지만, 가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점원은 특별히 직원 할인가로 구매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고, 며칠 뒤 할인행사가 계획되어 있다며 넌지시 정보를 알려 주기도 했다. 너스레를 떠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한참 웃더니, “살림 잘하시겠네요” 라며 흔쾌히 값을 깎아 주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할인해 주는 대신에 샘플로 나온 거라며 덤을 주는 일도 있었다.
내가 만약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들이 과연 내게 일어났을까? 그리고 내가 당연한 권리인 양 무리하게 강요했다면 그런 기적 같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까?
다른 것은 없었다. 난 단지,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는 이처럼 크게 달랐다. “입 뒀다 뭐해? 상대에게 실례가 되는 일만 아니라면, 한번 말이라도 해보자.”라는 말이 내 신조가 된 순간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런 내 신조가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다. 법조계에서 회자되는 말 중에,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독일의 법학자인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이 그의 저서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누군가에게 어떤 법적 권리가 있다면 그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한 보호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 말을 조금 확대 해석해보면, ‘권리는 주장해야 보호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내 엉뚱한 신조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나름대로 탄탄한 이론적 뒷받침을 지닌 의미 깊은(?) 신조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아니라 해도 상관은 없다. 난 그저, 표현은 좀 이상할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는 뿌듯함 가득한 신조임을 말해두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말 한마디가 가져오는 변화는, 비단 물건값을 흥정할 때만 적용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변화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만 생각해 봐도 그랬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겠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유별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안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회사에 “말(=요구)”을 했다. 이것이 문제라고, 이것이 불만이라고, 때로는 자신의 사정을 좀 봐 달라고, 그렇게 자꾸만 말을 했다. 대부분 말도 안 되는 억지이거나 자신의 입장만 고려한 이기적인 생각에 불과했지만, 놀랍게도 누가 봐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주장을 간혹 펼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회사에서도 그들의 주장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회사에서 어떤 제도를 시행할 때에는 언제나 논리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외사항까지 충분히 검토한 후 시행하지만, 모든 일이 그러하듯 생각과 실제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언제나 보완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럴 때, 누구나 납득할 만한 사원들의 의견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설사 그 의견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득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 유별난 사람들은 이처럼 “말”을 통해 견고할 것 같은 회사의 의지를 설득하여 변화를 이끌어 내고, 그리하여 원래라면 받지 못했을 수혜를 기어이 얻어내기도 했다.
그들이 만약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수혜를 얻을 수 있었을까? 상황이 변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 자체를 두고 나쁘다고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억지만 아니라면, 그리고 의도치 않게 남에게 피해가 되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다.
생각해 보면, 회사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각종 규칙과 프로세스를 지키고, 주위 동료를 깊이 배려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그런 착한 사람들은 왜 자꾸만 손해 아닌 손해를 봐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배려심이라는 명목 하에, 혹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나을 듯 싶다. 그것은 확실히 착각이다. 내가 해 봐서 안다. 누군가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라 해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아내에게 행동으로 보여주려다 괜한 오해만 쌓여 힘들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역시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내 마음을 전혀 모른다. 부부 사이에서도 그런데 타인은 오죽할까?
그러니, 나를 둘러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혹은 찾지 못한 내 권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사랑받는 남편이 되기 위해서라도, 용기 내 말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 같다.
입은 두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는 거라 믿으며, 오늘도 나는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