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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TV Nov 26. 2021

소중한 나의 잡은 물고기

도리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 ③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다들 그러하듯 나는 참 많이도 말썽을 피우고는 했었다.


방 안을 예쁘게 꾸미려고 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마른 갈대 잎에 라이터로 불을 질러 방안을 태울 뻔하기도 했고, 호기심에 은박지를 말아 전기 콘센트에 집어넣다가 하마터면 감전될 뻔한 적도 있었다. 동네 아이들과 밭에 심어져 있던 고구마를 엉망으로 만드는 바람에 동네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치며 쫓아와 도망친 적도 있었고, 쥐불놀이를 하겠다며 공사장에 있던 나무 거푸집을 모조리 뜯어 친구들과 함께 태워버리고는 좋다며 깔깔거리던 적도 있었다. 장난치기를 이렇게 좋아하다 보니, 다치기도 참 많이 다쳤다. 쫓아오는 친구를 피해 도망치려고 교실 책상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다 교실 마룻바닥에 처박혀 다친 적도 있었고, 공중목욕탕에 있던 옷장을 기어오르려 하다가 옷장 전체가 그대로 기우뚱 넘어와서 속절없이 밑에 깔리기도 했다. 덕분에 어릴 적 내 온몸은 한시도 멀쩡한 적이 없었다.


멀쩡하지 않은 것이 어디 몸뿐일까? 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내 주위의 물건들은 부서져갔다. 거실에서 살짝 공놀이를 한 것뿐인데 친구 집 유리창이 갑자기 깨지고, 집에 가고 싶다고 할머니에게 몸부림치며 떼를 쓴 것뿐인데 할머니 집 미닫이문이 부서졌다. 집에서는 멀쩡하던 내 장난감이 이유 없이 부서졌고, 학교에서는 여태까지 잘 쓰고 있던 나무의자가 괜히 부서지고 멀쩡하던 칠판지우개가 힘없이 찢어졌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결코 이런 일을 의도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고, 또 억울했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억울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있나? 저지른 일이 있으니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의 잔소리를 말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런데, 그때 어른들에게 혼나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말이었다.


“남의 물건을 내 것처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해. 그래야 착한 아이인 거야.”


어린 마음에도 어른들의 그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비록 내가 의도해서 그런 것은 절대! 결코! 아니지만, 내 물건을 누군가 함부로 망가트리면 무척이나 슬플 것이 분명하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남의 물건을 내 것처럼 소중히 여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물론, 그런 마음을 갖고  것처럼 소중히 여겼는데도 여전히 뭔가 자꾸만 망가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의 물건을 내 것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조차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당연한 말이다. 너무도 당연해서,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살아가기 위해 서로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세상의 법칙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법칙이라 하니까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법칙이 별건가?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모두 세상의 이치이고 법칙이 아니겠는가? 내가 죽기 싫으니 남을 해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뺏기기 싫으니 남의 것을 뺏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비슷한 맥락에서 이 말도 우리가 지켜야 할 그 많은 세상의 법칙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누군가 내 물건을 함부로 망가트리면 난 너무도 슬플 것 같다. 내가 그렇다면, 남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남의 물건도 내 것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너무도 자명한 논리이고, 그래서 세상의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는 비단 물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논리 그대로 사람에게 확장해 본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 나를 함부로 하면 난 너무도 슬플 것 같다. 내가 그렇다면, 남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니, 남도 나 자신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런데, 뉴스나 다른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듣는 세상을 보면, 가끔 이런 당연한 법칙과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반 친구를 괴롭히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힘든 일을 마치고 마음의 안식을 얻어야 할 가정에서도 누군가의 폭력에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연인 사이에서는 사랑을 이유로 자신의 생각을 무리하게 강요하고, 가끔은 한순간의 분노를 미처 참지 못해 데이트 폭력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나는 너무도 슬펐다. 좀 더 상대를 소중히 여길 수는 없었을까? 왜 남을 함부로 대하고, 무심한 말로 상처를 주고, 심지어 폭력까지 휘두르는 것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거나 폭행을 당하면 무척이나 아플 것인데… 내가 당하면 아프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면서 왜 남에게는 그런 아픔을 주는 것일까? 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은 어린아이조차 알 정도로 당연한 일인데… 그런데, 왜 사람들은 가끔 그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일까?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불합리한 일을 당하거나 어떤 모멸감을 느꼈을 때,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때로는, 누군가에게 미칠 듯이 감정을 쏟아내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럴 때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다름 아닌 인간이니까. 불안정한 감정을 지닌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굳이 이해해 보고자 애써 노력한다면 조금은 이해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든,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든, 그 분노가 친구, 가족, 연인처럼 나와 가까운 사람을 향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내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슬펐을 때가 바로 이런 때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사람으로 통하던 사람이 집에 오면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해서 아내와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열렬한 구애 끝에 사귀게 된 연인에게 잊혀지지 않을 상처를 주고,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소중한 친구를 무시하고 속이고 이용하는 그런 때 말이다.


왜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 잡은 물고기이니까? 이미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일까? 하지만, 알다시피 사람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물건이 절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어떤 이유가 있었건, 부부나 연인처럼 남이 간섭하기 어려운 어떤 특별한 관계로 묶여 있건, 온전히 내 것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잡은 물고기를 좀 더 소중히 여길 수는 없을까?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간지럽지만, 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친구는 나 스스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진정한 내 모습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고, 연인은 누군가를 배려하고 베푸는 법을 가르쳐 주는 소중한 선생이며, 배우자는 서로 믿으며 평생 동안 함께 같은 길을 나란히 걸어가면서 간혹 잘못된 길로 가는 내게 쓴소리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동반자라고.


그래서, 친구는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연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의를 다해야 하고, 배우자는 나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받거나 이용해 먹으려는 계산적인 마음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생각을 강요하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그리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고 용기를 내 고백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단지 귀찮은 집안일을 맡기고 온갖 감정의 편린을 쏟아 내려고 청혼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처음 그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깎이며 그렇게 조금씩 희미해진 것일 뿐.


그렇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상처를 주고 있는 그 "남"이, 내 삶이 끝나는 순간 내 곁에 남을 유일한 "남"임을 이해하고 느낀다면, 그저 잊고 있던 처음 그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 소중한 나의 잡은 물고기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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