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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TV Sep 30. 2021

사회적이지 않은 사회적 동물

도리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 ②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BC 322년)는, 인간을 두고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모여서 살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연약한 우리가 외부의 모든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유기적인 집단을 이루는 것이 훨씬 낫고, 실제로 우리는 그런 집단적 시스템을 다른 동물들보다 효과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만물의 영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역시도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나 또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에 대해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미 날 때부터 집단적 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있어서인지 따로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마냥 당연하게만 느껴지니까. 만약 사람들과 동떨어져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그것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그 외로움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섭다. 외부의 위협 속에서 효과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의 결과라는 생물학적 분석과는 별개로, 인간은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이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나는 가끔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정말 사회적 동물일까? 어쩌면, 고도의 협업을 통해 외부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실현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필요성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었을 뿐,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있는 본성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닐까?’


내가 이런 의문을 품게 된 이유는, 사람들과 함께 바쁘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 문득문득 솟구치는 이런 내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다.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실 때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틀고는 한다. 조용한 음악과 함께 한잔의 커피를 즐기는 여유는 나의 거의 유일한 낙이니까. 그런데 항상 조용한 음악만 즐기고 싶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을 때가 있고, 그럴 때면 경쾌하고 강렬한 음악만 한 것이 없다. 내 공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볼륨을 높여 그 웅장한 음의 향연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왜? 나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난, 내 오디오의 성능을 확인하고 싶다는 그 강렬한 욕구를 억지로 억누를 수밖에 없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려는 차들로 꽉 막혀 있는 정체구간을 바라볼 때는 어떤가?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가 일렬로 늘어선 차량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충동을 도저히 억누르기 힘들다. 이 뿐인가? 여름이면 무더위를 피해 거추장스러운 옷 따위는 당장 벗어던지고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싶고, 먹다 남은 음식물이나 쓰레기 같은 것은 귀찮게 일일이 수거해 가기보다는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 싶다. 무엇보다 산책 중에 애완견이 싼 뜨끈하고 오묘한 느낌이 드는 똥 같은 것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거름이 될 것이니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비록 아무도 내게 미리 동의를 구한 적은 없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내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든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 동물인 채로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충돌하는 서로의 권리 사이에서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권리가 있든 어떤 피해가 예상되든 전혀 상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미친 척 넘지 말아야 할 그 선을 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한없이 이기적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는 단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지 않을까?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은 어쩌면 사회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이유다.


실제로 본성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본성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2012년 8월에 시작한 MBC 시사 교양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한 자연인처럼 말이다. 처음 그 방송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난 그렇게 오래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사회와 동떨어져 혼자 살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그것은 정말 착각이었다. 2021년 현재까지 그 방송은 매주 계속되고 있고,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다.


그런데, 그 방송에 출연한 많은 자연인들을 보면서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혼자 살면서 조금 외로움이나 불편함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삶에 만족하고 참 행복해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사회"라는 옷을. 전혀 사회적이지 않은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억누르고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기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만과 불행을 때때로 느끼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것은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의문이고 혼자만의 뜬금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내 생각 같은 것은 길거리에 치이는 돌을 보듯 무시해도 된다.


사실 우리의 본성이 어떻든 이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앞으로도 여전히 사회적 동물로써 많은 사람들과 함께 부딪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밖에 없다.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 또한 하나밖에 없 것 같다.


“서로에 대한 배려”




순간순간 고개를 드는 본성을 잠시 내려놓고, 내게 권리와 자유가 있 남 또한 권리와 자유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렇게 이해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 그것뿐이지 않을까? 무척이나 어렵지만, 그것만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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