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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TV Dec 07. 2021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도리를 아는 사람이고 싶다 ④


때로는 이기적이고 싶다.




기술의 변화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요즘, 한 기업이 10년 넘게 생존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고,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그때그때 기민하게 판단하고 대응하지 못하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력과 자본을 가진 대기업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니던 기업도 그랬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말 한순간이었다. 


한때, 많은 직원을 거느리며 잘 나가고 있던 우리 회사는 변화하는 시장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그 결과 명확한 해결 방안을 내지 못한 채 1년여의 시간을 우왕좌왕하기만 하다 순식간에 도산하게 되었다. 한 분야에서 높은 기술력을 가진 큰 기업도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어제까지 같이 근무하던 내 동료들, 그리고 함께 고생해 준 부하직원들은, 이제 각자의 삶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고 미리 약삭빠르게 발을 뺀 직원은 다행히 갈 곳을 정할 수 있었지만, 끝까지 남아 함께하려 했던 직원은 아무런 대비도 못한 채 맨몸으로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사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이런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게 인사담당자의 책임이자 도리라고 여겼다.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 온 인맥을 총동원해 직원들의 이직을 도왔다. 기업마다 채용계획이 있다 보니 쉽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몇몇에게는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내 직속 부하직원도 그중 하나였다.


새로운 회사의 인사팀으로 이직한 그 부하직원은, 그 후로도 종종 내게 연락을 해왔다. 주로 인사업무를 하다가 막혔을 때, 조언을 구하는 연락이었다. 나 또한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서 적응하느라 무척 바쁜 시기였지만, 내가 추천한 직원이 그 회사에서 누구보다 인정받기를 바랐고, 그동안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도 있어, 열심히 조언을 해주고 필요하다면 자료도 찾아 보내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직원에게서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회사 규정을 전부 손봐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요? 정말 급해서 그래요. 꼭 좀 도와주세요.”


너무도 다급한 목소리여서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급한 일만 서둘러 끝내고 일찍 퇴근한 나는, 부랴부랴 차를 끌고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곧 불안한 듯 서성이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잘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는, 내가 갖고 온 자료를 함께 참고해 가면서 그 회사의 규정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하자, 그는 그제야 비로소 안도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내게는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지금처럼 안전부절 못할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이번과 같은 어려움이 있을 때 혼자서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급히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가서 어떤 물건 하나를 가지고 왔다. 인사업무를 하는 동안 참고하려고 모아 놓았던 자료를 담은 USB였다.


“이건 내가 참고하려고 그동안 모아 놓은 자료들인데, 아마도 앞으로 인사업무를 하면서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내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자료라고 보면 돼. 각 분야별로 정리해 놔서 찾기도 쉬워. 이게 너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는 내가 준 USB를 손에 쥐고는 무척이나 감격해했다. 헤어지기 전까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야 돌아서는 그 순수한 모습을 보고, 나는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자식을 바라보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앞으로도 그러겠다고, 그때 난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 그에게서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내게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그렇게 여겼던 걸까?




사람들 사이에서 진심을 다해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며 살고 싶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살면 살수록 나만 점점 실망하고 상처를 입는 것 같았다.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말까지 생겨났을까?


사실 그런 말들이 없었더라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살아온 날은 그리 길지 않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그런 일들을 이미 질릴 정도로 수없이 겪어왔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란 원래 자신의 이익 앞에 한없이 약하고, 그렇다 보니 의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든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앞으로 내가 사람들에게 도리를 다하면 다할수록 자꾸만 실망하고 상처 받는 일이 많아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차라리 이기적으로 살면 어떨까?


내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 이익만을 위해 살고 내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모함하고 속이고 이용하고 빼앗으며 산다면, 설사 내가 누군가에게 똑같은 일을 당하더라도 적어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어쩌면, 내 삶의 방식 자체가 이기적이니, 누군가 내게 이기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지금과 달리 당연하다 여기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난 여전히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저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하며 살고 싶다.


살아가는 동안, 그 부하직원의 일처럼 앞으로도 분명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많은 상처를 입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내가 아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존중할 줄 알고, 지하철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자리를 양보할 줄 알고, 남을 돕고 배려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았다. 어쩌면,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처럼, 그 일부의 사람들에게 받은 실망과 상처가 내게 너무도 강렬하게 다가와서 더 크게 느껴졌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시간이나 분으로 세세히 나눈 후에, 좋았던 기억과 안 좋았던 기억으로 구분해보면, 내게 안 좋았던 기억은 몇 퍼센트나 될까? 실제로 해보지도, 장담할 수도 없지만, 분명 내 인생에서 안 좋았던 기억이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 그 나눠진 칸에 각각 색을 칠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안 좋았던 기억이 너무 작아서 오직 좋았던 기억의 색깔로 가득 채워지지 않을까?


내가 받았던, 그리고 앞으로 받을 실망과 상처가 두려워서 내가 해야 할 인간으로서 도리를 부정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내가 받은 실망과 상처를 이유로 누군가에게 또 다른 실망을 안기고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그냥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려 한다.


“괜찮아, 사람은 그럴 수 있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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