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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Aug 14. 2024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

프리다 칼로

나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씻었고 속옷도 빨았습니다. 나는 오늘 일과를 다 했습니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난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시체처럼 자겠습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중 정희(오나라)의 대사다. 술에 취해서도 집에 비틀비틀 돌아와 씻고, 속옷을 빨래하고 스스로를 망가지지 않았다고 되뇐다. 마치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망가져 버릴 듯이. 시체처럼 자겠다는 말에서 왠지 모르게 지금 순간에 눈을 감으면 내일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라는 무망함이 묻어있어 자꾸만 안쓰럽다. 


근육질의 남성이 드럼을 웅장하게 두드리며 크리스 마틴과 관객들이 모두 열창하는 콘서트장. 영국의 록 밴드 콜드플레이가 부르는 ‘Viva La Vida’는 인생이여 만세라는 에너지가 넘치는 뜻과는 달리, 이 문장을 가져온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서는 안도감과 망연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프리다 칼로, <Viva la vida> , 1954, 섬유판에 유채, 59.5 × 50.8 ㎝, 프리다 칼로 미술관, 멕시코시티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정희의 모습과 인생을 친히 부르며 만세라고 작품에 아로새긴 프리다 칼로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인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사연이 존재하지만, 어떤 이들의 인생은 불가항력적으로 아프다. 재해에 의해, 사람에 의해, 사랑에 의해 사고를 당한 이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계속해서 다독이고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운명론적인 태도로 견뎌내는 것뿐이다.  


출처 : https://terms.naver.com/list.nhn?cid=44533&categoryId=44533


금가루를 뒤집어쓴 피갑칠 소녀


1907년 7월 6일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시티 교외의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헝가리계 독일인인 아버지와 멕시코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프리다는 자유를 뜻하는 프리덤의 독일어 표현이다. 그러나 이름과는 다르게 그녀의 인생에서 육체의 자유로움은 용납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네 자매 중 셋째였던 프리다를 가장 아꼈다. 아들과도 같은 특별함을 지녔던 프리다를 당시 여성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학교에 보내 해부학과 의학 공부를 하게 했다. 6살 때 척추성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된 프리다를 위해 운동 및 물리치료, 사진과 예술을 직접 가르치는 등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른 가족보다도 돈독했다. 


고통은 너무나도 젊고 싱그러운 시절에 갑작스레 찾아와 프리다의 삶에 촘촘히 들러붙었다. 1925년 9월 어느 날의 오후, 의사가 꿈이었던 18살 소녀에게 일어난 버스 사고에서 숨이 붙어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도심 전차와 충돌한 버스는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승객용 손잡이가 달려 있던 쇠 파이프는 하필이면 프리다의 가슴과 골반을 관통했다. 갈비뼈의 일부, 요추, 쇄골, 어깨뼈가 모두 골절되거나 부러졌다. 그야말로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평생 진통제를 달고 살아야만 하는 시시각각 변주되는 통증과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그녀의 운명이 되었다. 


그날 버스 안의 승객 중 한 명이 금가루를 가지고 탔었다. 사고 현장에서 피갑칠이 된 프리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몸에서는 숨을 가파르게 쉴 때마다 피와 금가루가 섞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기괴하고 끔찍한 광경은 그녀의 삶에 대한 예고일까? 기어이 살아남은, 고통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는 끔찍하면서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준 것일까? 금가루를 뒤집어쓴 피갑칠의 소녀의 반짝이는 고통은 불행히도 이제 시작일 뿐이다. 


프리다 칼로, <Frieda and Diego Rivera>, 1931, oil on canvas, 100.01× 78.73 ㎝, SF MoMA


그저 악수와 비슷한 거야, 신경 쓸 거 없어


프리다의 신체를 짓이긴 버스 사고와 이항대립적으로 정신을 부서뜨린 사고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였다. 21살의 연상, 키는 20센티나 더 크고 몸무게는 100킬로그램이 더 나가는 거구의 남자, 멕시코 벽화 운동으로 인기 스타였던 디에고 리베라는 또 하나의 평생에 걸친 거대한 사고였다. 음경 전체에 암세포가 퍼질 때까지도 개선되지 않은 그의 방탕한 여자관계에는 프리다의 여동생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평생 두 차례 심각한 사고를 겪었다. 디에고와의 만남은 두 번째 사고였다”


학창 시절, 벽화를 그리는 디에고 리베라를 프리다와 친구들은 놀림거리로 삼고 종종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프리다는 언젠가 디에고와 결혼할 것이라고 친구들 앞에서 떠들었다. 이것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는 15살의 한참 반항기 가득한 꿈 많은 소녀가 알 턱이 없었다. 


버스 사고 후, 프리다의 부모님은 프리다를 위해 천장과 침대에 거울을 붙여주고 특수 이젤을 만들어 주었다.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울 속 엉망진창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온몸의 고통을 느끼는 일뿐이었으므로 온전한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잠시라도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그림에 대한 예술가의 평가 혹은 조언을 듣고 싶다고 자신을 찾아온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매료당한다. 악연 또한 지독하게 끌린다는 말처럼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어마어마한 치료비로 인한 집안의 기우, 22살의 결혼, 세 번의 유산, 후유증으로 인한 여러 번의 수술(그중에는 디에고의 관심을 끌려고 받은 수술도 몇 차례 있었다), 남편과 여동생과의 바람, 더더욱 많은 여성들과의 향락, 인생의 뭐 하나 그녀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자신의 여성 편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모델들과 관계를 맺는 건 그저 악수와 비슷한 거야. 당신이 신경 쓸 것 없어.” 


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 캔버스에 유채, 40 × 30.7 ㎝, 돌로레스 올메도 컬렉션, 멕시코시티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립니다


프리다의 작품은 대부분 프리다 본인이 등장한다. 첫 번째 사고 후에는 망가진 신체 속에 내던져진 자신의 내면을 자서전보다 명확하게 그려냈다. 항상 입고 있는 멕시코 전통의상은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한 사치스러운 단장만이 아니었다. 거주지를 옮긴 뉴욕에서 미국인들의 조롱을 받아도 자신의 민족성을 지켜낼 수 있는 일종의 부적이며 영혼, 작품 그 자체였다. 


“내가 나를 그리는 것은, 그것이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 사고인 남편 디에고를 따라 뉴욕과 멕시코를 오가며 뉴욕에 머무르는 시간 동안 프리다는 외로웠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었으나, 디에고는 밀려오는 벽화 작업에 몰두하거나 다양한 여성들과 악수를 하느라 바빴다. 


외로움 속에서 그린 작품은 자기 자신만을 그리는 것에서 확장하여 이제껏 눈으로 담아 왔던 것들을 담게 된다. 아버지의 초상, 고대 아메리카의 조각상, 봉헌화, 고야와 브뤼헐의 그림 속 주제들 등 삶에서 보고 만나고 만져본 것들을 주제로 작품을 이어나갔다.


1938년, 디에고의 강권에 떠밀려 대학 갤러리에서 열리는 합동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구매자가 생긴다. 같은 해 초현실주의의 주창자 앙드레 브르통의 찬사로 이어지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심이 쏟아진다. 


이어서 뉴욕과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뒤샹, 호안 미로, 칸딘스키, 피카소의 호평을 받았으나, 프리다 본인은 초현실주의라는 단어에 단호하게 반응했다. ‘화려한 멕시코 의상을 입은 타지에서 온 여성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평가받기엔 그녀에게 본인 작품은 초현실이 아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이 보기엔 그저 꿈, 악몽, 고통의 무의식적 상징일 수 있으나 그녀에겐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삶을 겪어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코 꿈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현실을 그렸습니다.”


프리다 칼로, <두 사람의 프리다>, 1939, 캔버스에 유채, 173.5 × 173 ㎝, 멕시코시티 현대미술관

 

부디,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1939년 디에고 리베라와의 이혼 후, 두 사람의 재결합은 1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쩌면 프리다는 유산한 3명의 아이에게로 향해야 마땅한 모성애를 남편에게 돌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디에고 리베라를 갓 태어난 아기처럼 항상 팔에 안고 싶습니다.”


이후 프리다는 정말로 디에고를 자신의 신체 일부로 받아들인 듯한 그림을 그린다. 또한 멕시코 국립예술원에서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의 특별 상금을 받는 등 기존 여성에게 제한되었던 상과 상금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수상 이후 학생들을 교단에서 가르치기도 하는 등 멕시코를 위한 다양한 사회 및 예술 활동을 이어 나간다. 나의 아기를 품에 안은 강인한 어머니이자 세상을 자신에 폭에 감싼 멕시코 대지의 여신처럼. 


그럼에도 그녀의 건강은 더더욱 악화되어 갔다. 여러 차례 실패한 수술과 모르핀 중독까지 육신의 고통은 그녀를 결코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프리다가 죽기 일 년 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며 첫 멕시코 개인전을 개최한다. 전시회 당일에는 너무나도 악화된 건강 때문에 침대에 누운 채로 참석하여 손님들을 맞이했다.


결국 끝없어 보이던 불가항력적인 고통은 마지막 외출로 해방되었다. 47세의 마지막 생일을 축하하고, 1954년 7월 13일 밤, 자신이 태어났던 카사 아술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고통스럽지만 소소한 행복의 순간이 존재했고 온몸을 바쳐 자신의 삶을 그려내며 버틴 나날이 존재했으며,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로웠지만 그 창자까지 내어줄 만큼 사랑했던 이도 프리다에게는 존재했다. 하지만 이쯤 하면 됐다는 듯,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인생이었다. 


누군가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으면서도 빛난다. 때론 실패하고, 좌절하고, 자학적일지라도 자꾸만 그 고통을 바라보고 직면해야 한다. 금가루를 뒤집어쓴 피갑칠의 소녀는 자신의 삶을 고통으로 반짝거리게 했다. 끝의 시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인생이여 만세라고 절절하게 말하는 프리다의 삶의 고백을 들으며 그녀의 마지막 외출이 부디 평온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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