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로스코
지독한 색 앞에서
스탕달 신드롬. 예술이나 음악, 숨 막히게 아름다운 어떤 것에 노출되었을 때 빠른 심장 박동, 실신, 혼란 등을 순간적으로 일으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2015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탕달 신드롬을 겪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숨죽여 울었고, 누군가는 과호흡을 일으키다 못해 잠시 기절했고, 누군가는 밀도 높은 우울을 그림 앞에서 한참 앓았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겪는 일이기에, 로스코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중 하나가 스탕달 신드롬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로스코가 손목을 그어 자살하기 직전 그린 붉은색으로 가득 찬 작품, ‘무제(1970)’ 일명 ‘레드’라 불리는 작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 지독하다. 형태도 없이 칠해진 이 거대한 붉은 덩어리 앞에서 왜 이토록 지난하고도 지독한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가장 깊숙이 숨겨두었던 내면의 불안을 쥐고 흔드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영어로 말할 줄 모릅니다
1903년 9월 25일 마르쿠스 로트코비치(마크 로스코)는 러시아 제국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 드빈스크에서 유대인 아버지 야크포 로트코비치와 아내 안나 골딘의 넷째 아이로 태어났다. 40년이 지난 후에야 미국 뉴욕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마크 로스코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로스코는 네 살부터 열 살까지 탈무드 토라 학교를 다니며 러시아 내 유대인 한정 거주 지역에 살았다. 로스코가 열 살 되었을 때, 정치적으로 유대인에게 적대적이었던 러시아 제국을 피해 로스코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가기로 한다. 미국식 이름 마커스, 성은 로스크위츠로 바꾸고 목에는 “나는 영어로 말할 줄 모릅니다”라는 팻말을 걸고 고향을 떠났다. 아메리칸 드림, 기회의 땅인 미국으로 들어가 일생을 보냈지만, 로스코는 이름도 언어도 정체성도 바꿔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미국의 오리건 주 포틀랜드로 정착했지만, 6개월 후 로스코의 아버지는 대장암으로 사망한다. 로스코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위해 군 면제가 되는 탈무드 학교에 로스코를 보냈고 반유대적인 학살 속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로스코의 유년 시절은 양가적인 충돌의 연속이었다. 보수적인 탈무드 학교에서 배운 신앙과 그와 정반대되는 진보적인 가족의 정치적 성향, 모국어와 충돌되는 영어,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겪은 유대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부조리한 사회구조 속에서 로스코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든 증명해야만 했다.
이게 내가 살아야 할 삶이야
보잘것없는 직장, 형편없는 수입과 가난으로 몸서리칠 무렵, 1923년의 어느 날 스튜던츠 리그에서 인체 드로잉을 배우는 친구의 집을 방문하면서 삶의 새로운 문이 열렸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로스코는 이것이 내가 살아야 할 삶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서른 살 무렵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으나 대중적인 인지도는 미미했다. 하지만 다행히 시대가 변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 중 공공 예술 작품 진흥을 위해 설립된 기관에서 예술가로 일하기 시작하며 마침내 쓸모 있는 미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진다.
1938년 마침내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2년 후에는 마커스 로스크위츠에서 마크 로스코로 개명한다. 고통스러운 과거와 함께 기존의 이방인의 정체성을 떠나보내려는 몸짓이었다.
당시 미국은 모마(MoMA)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의 개관으로 현대 예술의 역동적인 중심지로 변화 중이었다. 유럽의 모더니스트들과 미국의 동료 예술가들의 중간에 위치한 유대인은 중요한 매개자의 위치로 자리 잡았고 미국 예술가들의 사회적 투쟁에서 유대인은 주요 인물이 되었다. 미술의 상업화를 대항하는 투쟁자로서 로스코는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을 본능적으로 재빨리 거머쥐었다. 자기 자신이 신대륙 예술의 운명을 짊어진 화가이자 투쟁가임을 확신했다.
성공을 향해서, 절대적 추상을 향해서, 그리고 추락을 향해서
로스코의 작품은 점차 초현실주의와 추상 사이의 시기로 진입하면서 자유로운 선, 과감한 형태, 수채화처럼 얇아진 물감 층의 변화가 생긴다. 이 시기 지속적인 투자자가 생겨나면서 그동안 생계를 위해 근무했던 학교 교사를 그만두게 되며 색채와 추상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기존의 유럽 미학과의 결별을 선언하며 미국적인 예술을 창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시대적 흐름은 로스코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투자자 베티 파슨스의 갤러리에 추상 회화를 전시하면서 인생의 상승세에 본격적으로 올라탔다.
1950년에는 뉴욕 타임스 평론가의 호평을 받으며 유명세에 오르고 점차 거대한 작품을 완성하며 절대적 추상으로 향해간다. 거대한 색채의 덩어리들은 53세의 나이에 당시 최고 가격 기록을 세운다. 점차 작품 색의 채도는 어두운 색과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음울하고 음침하다는 비평에도 불구하고 관객과 컬렉터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비극, 황홀경, 파멸 등과 같이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 관심이 있다, 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겪었던 것과 동일한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급작스러운 물질적 편안함은 오히려 로스코를 불안정하게 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서 강제적으로 추방당한 유대인이 미술의 상업화를 대항하는 것만큼 정의로운 투쟁은 없었다. 과거에 맹렬히 비난했던 미술 산업의 기득권들이 제공하는 경제적 보상, 인정이 따르자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공허해졌다. 기득권에게 향했던 경멸은 곧바로 자기 자신에게 향했다.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그는 인생의 상승 곡선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지만 오히려 태양빛이 너무 뜨거워 날개가 하나씩 타버렸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인정 욕구에 집착하는 불안한 영혼
로스코를 불안하게 한 것은 정체성의 혼란만이 아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인정에 대한 집착은 나날이 심해졌다. 자신의 필요를 증명하려 애써온 극도의 자의식을 가진 한 유대인에게 세상의 평가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남들에게 평가받기 두려움은 방어 기제로 기존 미술 상업과 비평가들을 향해 투쟁으로 나타났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성공과 인정은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얼굴들이 집행하는 평가의 연속이었다. 본인의 작품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피해망상 속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가득 채웠다.
불안의 확장은 알코올과 항우울제의 남용, 모든 인간관계의 불화로 번져가며 로스코의 삶을 좀먹었다. 자신의 유산을 사취할 목적으로 접근한 사람들 속에서 항상 날이 서있었으며, 세상과의 단절과 고립은 심화되어 갔다.
인생의 마지막 시기는 그토록 오랜 시간 고대하던 휴스턴의 예배당 패널화를 작업했다. 예배당이 개관하기 딱 1년 전 1979년 67세에 그는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울부짖는 듯이 그려낸 마지막 작품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는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몰두한 것은 자기 자신 내면의 내상이었다. ‘예술은 영혼을 위한 경험’이라고 주장하던 로스코의 작품 속에서 불안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예술은 불안의 영혼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이 인간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로스코의 작품은 자신의 영혼의 문이 여기 있으니 부디 마주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예술이 인간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하는 말은 자기 자신의 심연을, 불안을 다독이며 들려주는 말이었을 것이다. 비록 자기 자신은 불안에서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결말을 맺었지만, 로스코 채플을 방문해 눈물로 내면의 상처를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예술이 인간 영혼의 치유를 위한 것임을 체감하게 한다.
유난히 모든 것이 불안한 날 로스코 채플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거대한 차원의 문 같은 작품 속에 꽁꽁 둘러싸여 로스코의 불안을 넘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순간을. 올곧은 자세로 앉아 그것들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