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그까짓 지구 좀 멸망하면 어때
영화 ‘멜라콜리아’는 극 중 지구와 충돌하는 소행성의 이름이자 우울증을 뜻하는 단어다. 주인공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은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인물로 지구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가장 태연하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서 담뱃재 맛이 난다고 할 정도로 삶이 무망한 그녀에게 그까짓 지구, 멸망 좀 하면 어떠랴.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는 정신과 의사와의 대화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큰 스트레스를 겪는 일을 만났을 때 보통 사람들은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되지만, 오히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오히려 대단히 침착하다는 것. 이미 불안과 우울이 잠식된 사람에게 지구 멸망과 같이 거대한 사건 앞에서는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기 자신과 불화한 사람은 시대나 환경과의 불화 또한 담담히 받아들일 수도 있을 터이다.
세계적인 절규의 시그니처 포즈를 그려낸 예술가 에드바르 뭉크 또한 자기 자신과 불화한 사람이었다. 한 손을 턱에 괸 멜랑콜리아(우울증)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 속 남자는 타오르는 배경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만약 지구가 소행성에 부딪혀 모든 것이 사위어가도 초점 없이 망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턱을 더더욱 손에 깊숙이 묻고 한숨만 더 깊게 쉴 것 같다.
어차피 사는 거 소질 없으니 ‘그까짓 지구 멸망하라지’면서.
생애 처음부터 함께한 병, 광기 그리고 죽음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로텐에서 태어난 에드바르 뭉크는 병약한 아이였다. 만성 기관지 천식을 가지고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골골거리기 일쑤였지만, 정작 본인이 곧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과는 달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그의 가족들이었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13세에 누이 소피에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의 반동으로 엄격한 종교 생활 방식을 강요했다. 고위 성직자나 학자들을 다수 배출한 뭉크의 가문은 명망 높은 가문으로, 아버지 또한 의사였다. 그러니 골골거리는 나약한 아들이 아버지 마음이 들었을 리 만무했다. 병약한 몸, 가족들의 죽음, 죽음에 대한 죄책감, 명망 높은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환경, 모든 것을 통제하는 아버지까지 모든 환경이 뭉크에게는 노르웨이의 황량하고 혹독한 겨울만큼 추웠다.
결핍된 어머니의 사랑은 누이 소피에와 이모 카렌이 대신해 주었다. 그러나 이미 삶 속 깊이 자리 잡은 결핍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누이이자 자신의 어머니였던 소피에가 세상을 떠난 후, 뭉크는 “저기 머리가 보이지? 저승사자가 있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그가 그때 본 것은 단순히 병리학적인 현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병이 옮아 누이가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어둠의 분신이었을까.
뭉크는 건강 때문에 학교도 그만두었다. 친구 한 명 없는 이 외로운 소년의 마음에는 유폐된 우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따라다녔다.
“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나와 내 생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다. 나는 그 어떤 것이 이처럼 나를 예술가로 만든 것인지를 모르겠다.”
방황하는 청춘
20대는 찬란한 청춘이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청춘이 얼마나 찬란한지 그 시기에 깨닫기는 어렵다. 누군가에겐 오히려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무엇인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뭉크는 1881년 3월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다음 해인 1882년 자신의 그림을 처음 팔게 되며 친구들과 아틀리에를 임대하는데 이 시기 자유연애, 무정부주의, 무신론, 사회적 불평등 등 정치적 사안에 관심을 지닌 사회 운동가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에게 큰 자극을 받지만, 동시에 이들의 급진적인 주장은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는 뭉크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아버지와의 마찰, 여전히 지속되는 경제적 어려움,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 재발까지 화가로서 성공해야만 한다는 부담, 사회 운동의 압력까지 뭉크에게 20대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1살의 뭉크는 유부녀 밀리와 사랑에 빠져 첫사랑을 혹독하게 치른다. 밀리 쪽에서 뭉크에 대한 마음이 식어버려 끝난 한여름 밤의 꿈같던 사랑은 이 순진한 청춘에게 절절한 상처를 입힌다. 밀리와 한 번이라도 우연히 마주치려고 칼 요한 거리를 정체 없이 돌아다니던 그 찌질했던 방황은 훗날 그림의 주제가 되어 혁신적인 예술인 표현주의를 탄생시키게 된다.
“고독했고, 영혼도 몸도 아팠다.”
생선 건더기가 떠 있는 가재 소스 같은 그림
1885년 가을 전람회에 자신의 작품 <습작>, 아픈 아이를 그린 그림을 출품하게 된 뭉크는 ‘생선 건더기가 떠 있는 가재 소스 같다’라는, 음식물 쓰레기 같다는 평을 받는다. 사실주의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아직 완성도 다 되지 않아 제목도 <습작>이었던 그림이 혼란스러웠던 것은 당연하다. 자신이 겪은 경험이나 기억, 직관을 그리는 것 자체가 천박스러운 시대였다.
뭉크는 자신이 세상에 보여줘야 할 그림은 살아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강렬하게 살아남고 싶어 하는 삶의 순간순간과 먼저 떠나는 이들에게서 남겨진 자들의 아픔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었던 것이다.
혹독한 평을 받은 후 뭉크는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에서 인상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를 흉내 내면서 자신만의 예술의 방향성을 확립하여 노르웨이에 돌아온다. 비록 파리에서는 월세조차 낼 수도 없어 창문으로 야반도주할 정도로 가난하고 남루했지만, 뭉크는 자신의 그림들이 거대한 인생의 장면들임을 깨닫는다. 이미 사랑부터 불안과 죽음까지 그림을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 <생의 프리즈> 연작이 구상되고 있었다. 이는 30년간 회화, 드로잉, 판화 등 다채로운 매체로 표현하게 되는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였어요
파리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노르웨이로 돌아와 전시회를 개최한 28살의 뭉크에게 베를린에 초정 받는 일생의 기회가 찾아온다. 신인의 젊은 작가에게는 가난하고 비루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과도 같은 기회였을 것이다.
55점의 작품을 들고 베를린 ‘건축가의 집’에서 11월 5일 첫 전시회를 열었지만 전시는 며칠 만에 폐쇄된다. 음식물 쓰레기 같다는 이전의 잔인한 평 못지않게 ‘예술에 대한 모욕’이라는 혹평과 반발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일명 이 ‘뭉크 스캔들’은 이제 뭉크에게는 인생 난이도 ‘하’ 수준이었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니고, 모욕은 이미 다채롭게 들어봤다. 게다가 이 스캔들로 인해 소규모 전시 요청이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며 독일과 스웨덴에서 미술의 선구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니, 베를린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1993년 나치 정부가 퇴폐 미술로 낙인찍어 82점을 압수하기 전까지 뭉크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독일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30대 중반의 나이에 뭉크는 부유한 상류층 출신 미혼 여성인 툴라를 만나게 되는데, <마돈나>와 <뱀파이어>를 제외한 작품의 부정적인 여성의 얼굴의 주인공은 툴라라고 추측된다. 툴라와는 약혼까지 하게 되지만, 독촉되는 결혼과 집착에 뭉크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무심했다.
툴라는 뭉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살 협박 소동까지 벌이게 되고 결국 사달이 났다. 술에 잔뜩 취한 뭉크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툴라, 그리고 쾅 하고 터지는 총소리. 결국 뭉크의 왼쪽 중지 하나가 총알에 날아가며 관계는 박살이 났다. 훗날 뭉크는 아무래도 자신이 총을 쏜 것 같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건 사고였어요. 어디까지나 실수였습니다.”
툴라와의 만남이 사고였는지, 권총 오발 사건이 실수였는지, 그 사건 이후로 뭉크의 알코올 중독, 신경 쇠약, 대인 기피증은 더욱 깊어졌다.
내 그림은 나의 일기와도 같다
뭉크의 신경 쇠약과 알코올 중독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예술가로서는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되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1908년 뭉크의 절친한 친구이자 애호가였던 옌스 티이스가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뭉크 주요 작품들이 미술관 소장품으로 대거 구입된다. 해외뿐만 아니라 모국에서도 인정을 받는 분위기가 조성되며 노르웨이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게 된다. 노르웨이 지폐에 들어가 있는 그림인 오슬로 대학의 벽화 작업은 노르웨이가 얼마나 뭉크를 인정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스물다섯의 나이부터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해외와 노르웨이를 떠돌던 뭉크는 1916년 쉰두 살의 나이에 에켈리라는 해안가 마을에서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하며 1944년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고립되고 고독한 생활을 이어가며 노년에는 오른쪽 눈 혈관이 터지는 병을 얻게 되어 실명 가까운 상태에 이른다. 수염을 길러서 사람들이 자신을 못 알아보게 하고 집 근처로 오는 사람들을 거칠게 내쫓았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죽음의 걱정과는 달리 뭉크는 향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절규>에서 비명을 지르는 객체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비명을 지르는 자연의 소리에 필사적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은 뭉크 자신이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죽음의 그림자와 죄책감, 작품에 대한 충격적인 비난과 혹평, 30년 동안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청춘, 지독한 사랑, 외롭고 고독한 말년까지. 모든 자연과 환경은 비명을 질러댔다.
자기 자신과 시대와 환경에 불화한 사람, 패닉에 빠져 부서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도 귀를 막고 오히려 침착하게 삶을 이어간 사람. 멜랑콜리한 인간은 그림으로 자신의 우울한 일기를 써가며 상처 속에서 그렇게 충실히 오래오래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