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그래서, 이게 뭐야?
2021년 마크 저커버스는 페이스북의 명칭을 ‘메타’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메타버스 기술의 적용이 페이스북의 장기적인 계획임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메타’로 변경한 것. 명칭이 변경된 ‘메타’는 첫 번째 광고를 연이어 발표했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광고를 보고 난 후의 대부분의 반응은 이랬다.
“그래서, 이게 도대체 뭐야?”
광고에 사용된 작품은 앙리 루소의 <호랑이와 버펄로의 싸움>으로 그림의 배경은 밀림이다. 밀림 속 호랑이, 버펄로, 앵무새 등 야생 동물들이 갑자기 음악에 맞춰 둠칫둠칫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이곳은 상상력의 차원이다”라는 대사와 함께 다 함께 쿵작쿵작 춤을 추고 마무리된다.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인지, ‘메타’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알 수 없이 끝나버려 광고라고 하기엔 다소 난감하다.
재밌는 것은 원작의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이 처음 대중에게 공개될 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 왜 그린 거냐, 눈 감고 발로 그렸냐, 웃기려고 그렸냐 등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앙리 루소. 이렇게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비난하고 조롱했던 화가는 없었다.
메타는 광고 반응이 좋지 않자 부랴부랴 다른 광고를 제작했지만, 앙리 루소는 쏟아지는 비난을 대범하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기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떨쳐낼 수 없는 생래적 가난
1844년 5월 21일, 프랑스 작은 도시 라발의 소박한 가정에서 앙리 루소는 태어났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던 환경 속에서 자란 루소는 가족으로부터 그 어떠한 예술의 영향 및 지원은 받지 못했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17살의 루소는 사무직에 종사하게 된다. 당시 하루 동안 3.33프랑을 버는 버거운 직장에서 세금 10프랑을 가로챘고 곧바로 체포되었다. 물론 일자리에서도 쫓겨났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대가는 무거웠다. 형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대에 지원하고 7년간 군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마저도 5년 차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장남으로서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로 제대했다.
제대 이후 파리에 머물면서 집 주인의 딸 클레망스와 사랑에 빠지고, 25살의 루소는 첫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생활 내내 가난과 질병은 두 사람의 아이들에게 들러붙었다. 첫아이는 18세에 결핵으로 사망, 둘째와 셋째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 아내 클레망스 또한 1888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루소는 자식과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진지하고 깊은 사람이었다. 가족들을 잃은 상실감과 극복되지 않는 가난 속 인생에 유일한 위안은 음악과 그림뿐이었다.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에도 대범하고 태연한 루소의 태도는 어쩌면 생래적인 가난 속 고난과 상실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먹고사는 원초적인 문제에 숨이 턱까지 차 허덕이다 보면 조롱 정도야 꿀꺽 넘겨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생계를 위한, 일요일의 화가
1871년 루소는 파리에서 세관원이라는 직장을 가지게 된다. 술과 와인의 유통을 검사하고 감독하는 관리인으로 도시에 물건을 판매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었다. 비록 보잘 것없지만 단순한 일이었으므로, 루소의 상관은 루소가 남는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릴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시간을 남을 때마다 그림을 그리고, 퇴근 후 그림을 그리고, 주로 일요일인 휴일에 그림을 그렸다. 유일한 도피처인 그림 속 세상은 가난하지도 누군가를 잃지도 않았으므로 안락하고 다채로웠다. 수정이 거의 불가능한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듯 루소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본 것과 아는 것을 꼼꼼하게 상상하고 배치하였다. 세상에 없는 장소를 만들고 좋아하는 요소들로 그 세상에 하나하나 넣어두는 상상으로 고된 직무와 가난을 버텨냈다.
이 때문에 루소는 ‘일요일의 화가’라고 불렸다. 지금이야 퇴근 후 자신의 여가와 휴일을 자기 계발로 할애하는 ‘갓생’ 같은 낭만적인 별명처럼 들리지만 당시에는 놀림거리였다. 모름지기 화가란, 전통적인 정규 교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하는 살롱 전에 뽑혀야 하며 작품을 팔아야 했다. 적어도 명암과 원근법은 알아야만 했다.
루소는 49세가 되던 1893년, 전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퇴직금을 받았지만 생계를 이어가는 것에는 충분치 않았고 여전히 그림은 팔리지 않아 도처에 빚을 졌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의 예술가 친구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집에 거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정하고 꿈만 가득한 이 몽상가는 모든 환경이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음에도 언젠가 세상에 소개될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런 글을 썼다.
“좌절과 실패를 수없이 겪었으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제롬과 클레망의 조언을 스승 삼아 화가의 길을 지켰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화가가 되어 마침내 재능을 인정받았다. 언론이 격려와 찬사를 보내고, 깊은 실의와 좌절의 시기에 재기하도록 도와준 데 대해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예술의 길을 지킬 것이다.”
부디 구입하여 소장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897년 전업 화가가 된 루소는 직접 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퇴사까지 한 전업 화가로서의 인정도 필요했다. 루소는 자신의 고향인 라발의 시장에게 직접 편지를 쓴다.
‘존경하는 시장님께, 외람되이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붓질을 배운 화가이자 라발 시의 시민입니다. 제가 그린 그림 그림을 한 점 추천하오니, 부디 고향 도시에서 구입하여 소장하면 좋겠습니다. [중략]
저는 라발 시에서 나고 자랐으니 여기서 제 작품을 한 점 사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소박한 희망이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공손한 그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그림을 구입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살롱 데 쟁데팡당 전시에도 출품한 적 있던 그림으로, ‘하품 나는 작품’, ‘사자도 어흥 하고 웃을 것이다’ 등 조롱을 받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웃기려고 그린 그림,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 눈 감고 발로 그린 그림, 완벽하게 무능한 하찮은 그림 등 조롱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비평가들과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좋은 방향으로 관심을 끌지는 않았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독창적인 양식이 차별성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 시대의 매우 대단한 두 화가가 있어. 하나는 너, 하나는 나
1905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시대가 오면서 루소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기욤 아폴리네르와 로베르 들로네, 피카소 등이 루소를 든든하게 지원해 주기 시작한다.
특히 루소의 절실한 친구였던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는 루소의 영예를 위한 연회를 주관한다. 피카소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루소의 그림을 소개하고 아폴리네르는 즉흥시를 지어 외쳤다.
‘잔 높이 들어 찬미하세! 우리는 프랑스인, 얼마나 큰 자랑인가!’
피카소에게 “우리의 시대에는 매우 대단한 두 화가가 있네. 이집트 양식에 속해 있는 자네와, 근대적 양식에 속해 있는 나 일세.”라고 고마움을 전한 루소가 얼마나 신이 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이들의 인정과 지지로 루소의 유치하고 기본도 근본도 없던 예술은 순수하고 독창적인 예술로 재평가 받게 된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루소를 비웃지 않았다.
내 작품에는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경제력과 세간의 인정으로부터도 조금씩 자유로워질 무렵, 고작 2년 정도밖에 누리지 못하고 1910년 9월 2일 루소는 파리의 병원에서 사망한다.
사망 후 시신은 금전적인 이유로 공동 묘혈에 매장되었는데, 몇몇 친구들은 1913년 충분한 돈을 모아 루소가 품위 있는 무덤에 매장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묘비에는 아폴리네르의 글이 쓰여있다.
‘착한 루소, 우리들은 너에게 붓, 물감, 캔버스를 보낸다. 현실의 깨달음이 있는 너의 신성한 취미를 위하여.’
이게 도대체 뭐냐, 왜 하는 거냐라는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닌 비난을 위한 질문 속에서도 나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순진하고도 고집 센 믿음 속에서 살아낸 루소. 분명 누군가는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이상 속에서나 사는 몽상가라고 흉을 봤을 터이다. 비록 서툴고 투박하고, 아무도 화가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의 인생을, 예술을 겁내하지 않았다. 그저 삶을 예술로 일구어 낸 사람이었다.
“내 작품에는 두려움이 없다. 그곳에는 오직 자유와 아름다움만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