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발라동
‘당신은요?’ 되묻는 사람
마릴린 먼로는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배우 그 이상,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의 삶이 단순히 ‘백치미’ 혹은 ‘섹스 심벌’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36살에 마감한 그녀의 삶을 회고하고 기억하고 기록했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한 인터뷰에서의 답변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
마릴린 먼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말에 한 기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나요?"라는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가장 아끼는 소장품이 430권의 책일 만큼 독서광인 먼로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기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혹시 책을 읽어보셨나요? 거기엔 그루센카라고 하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죠. 나는 그녀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우문현답과도 같은 그녀의 대답은 기자를 향해 ‘당신은 어떤데요?’라고 우아하게 되묻는다. 정해진 답에서 벗어나 명징하게 질문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어쩐지 남성 중심이 주류를 이뤘던 19세 말, 가장 비루하고 가난했던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삶을 겪어낸 여성 화가가 떠오른다. 화가들의 모델로 정해진 포즈만 짓는 것이 아닌 예술가로서 자신의 삶을 쟁취한, 삶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린 그림으로 ‘당신은요?’라고 우리의 인생을 되묻는 여성 화가, 수잔 발라동.
몽마르트르의 금쪽이
1865년 9월 23일 수잔 발라동의 본명, 마리 클레멘타인은 프랑스 리무쟁의 작은 마을 베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들렌은 세탁부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빈곤층의 여성이었고, 수잔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사생아가 태어나자 마을 사람들은 손가락질했고 그 성화에 못 이겨 수잔이 1살도 되기 전 파리의 가장 가난한 동네 몽마르트르 뒷골목으로 이사했다.
현재는 예술의 성지인 낭만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으나, 몽마르트르는 가난한 자들의 도시였다. 실패한 예술가, 하층민, 노동자들의 도시이자 유흥가의 여성들과 알코올 중독자들이 비틀거리는 도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거칠어지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 수잔을 감당하지 못했다. 테러 수준의 그녀의 기행으로 말미암아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 부디 사람 만들어달라고 보냈지만, 구제불능이었다. 학교 벽을 기어오르거나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싸움질을 해대는 그야말로 금쪽이었던 수잔은 결국 11살에 학교를 뛰쳐나온다.
열 살을 넘기면서 생계를 위해 수잔은 상점, 카페, 술집, 재봉사, 세탁부 궂은일을 배웠다. 그마저도 그녀의 야생마 같은 성격에 맞지 않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요즘으로 치면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주의력 결핍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에너지를 몰아 쓰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수잔은 자신이 쏟아야 할 에너지의 방향을 거친 삶속에서 조금씩 찾아가는 중이었다.
이거야! 이거야!
14살의 어린 수잔에게 있어서 서커스단의 공중 곡예사라는 직업은 너무나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며 박수갈채를 보내고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으며, 무엇보다 생계가 가능했다. 그러나 1년 후, 무대에서 추락한 그녀는 부상으로 곡예사를 그만두게 된다.
문이 하나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생계로 찌들어 고단했던 십 대의 몸은 처음으로 안식을 맞이한다. 수잔은 파리의 공원과 미술관들을 마음껏 쏘다니며 발산할 에너지를 예술로 방향을 돌린다.
16살, 수잔은 친구를 따라 당시 최고의 벽화가였던 퓌비 드 샤반의 화실의 모델이 된다. 모델 일을 시작한 수잔은 이렇게 외친다.
“나는 몇 번이고 나에게 ‘이거야! 이거야!’를 외쳤다. 하루 종일 반복해서 또 외쳤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마침내 내가 어딘가에 있다는 것과 이곳을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삶의 이유 앞에서 ‘이거야!’라고 외치는 소녀는 금방 입소문을 타게 된다. 부드럽고 흰 피부, 볼륨감 넘치는 몸매는 곧 르누아르의 붓질 속 매혹적인 여인으로 재탄생한다. 가난과 불행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류층의 여인처럼.
24살 차이의 르누아르의 연인이자 뮤즈로 지내며 18살에 아이를 낳지만, 르누아르는 강하게 자신의 아이가 아님을 부정한다. 어머니의 인생을 되풀이하듯 사생아를 낳고 화가의 인식 속에서만 규정된 존재가 되어 사는 삶은 이거야!라고 외친 탄성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너도 우리처럼 되겠구나
수잔이 살고 있던 몽마르트르의 건물 꼭대기에는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가 살고 있었다. 유서 깊은 귀족 출신의 로트레크는 유전적 결함 및 사고로 인해 성장이 멈춰버린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집안의 수치였기에 로트레크는 부유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만들고 거주하고 있었다.
불구의 몸으로 불행을 감고 있던 그가 수잔의 그림자를 못 알아봤을 리 없다. 로트레크는 수잔의 재능을 알아봤다. 본명 마리 클레멘타인이라는 이름을 수잔 발라동으로 바꿔준 사람도 로트레크다. 성경 속 자신을 겁탈하려던 장로들에 맞서 싸운 여성인 수잔나에서 따온 이름은 위태로운 그녀의 인생을 단단하게 지지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된다. 수잔은 결혼을 원했으나, 로트레크는 결혼을 원치 않았고 결국 수잔의 자살 소동이 한바탕 지나간 후 결별을 맞이한다.
결별을 맞이하기 전, 로트레크는 에드가 드가에게 수잔을 소개해 준다. 드가는 수잔의 재능을 바로 알아보고 “너도 우리처럼 되겠구나”라고 말했다. 드가는 판화 에칭 기술, 스케치 기술 등을 가르쳐 주는 평생의 스승이자 조력자가 된다.
훗날 1891년 드가의 도움으로 살롱전에 수잔 작품을 출시하게 되는데 이는 교육받지 않은 하층계급의 여성이 전시에 참가하는 전례 없던 일이었다. 1894년에는 여성 화가 최초로 국립예술학회에 작품을 전시하고 국립예술원 회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과거의 번데기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인생의 이름을 부여해 준 로트레크, ‘화가로서 ‘우리’ 동료가 되게 해 준 소속감을 부여한 드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빈자리는 이 두 명의 남성에게서 충분한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훗날 수잔은 “너도 우리처럼 되겠구나”라는 말을 들은 그날을 내가 날개를 달던 날이라고 말한다. 날개를 달게 된 수잔은 더욱 거침없이 인생과 예술에 뛰어든다.
저주받은 삼위일체
수잔의 남성편력은 당시 최고의 가십거리였다. 사생아였던 아들 모리스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준 스페인 출신의 화가 미겔 위트릴로와의 연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에릭 사티와의 6개월간의 뜨거운 연애와 사티의 결별 선언에 발코니에서 떨어지는 자살극을 벌이며 맞이한 요란한 이별, 에릭 사티의 친구이자 부유한 은행가 폴 무시스와의 결혼.
결혼은 13년간 지속되었고 드디어 그토록 허덕이던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생활을 했지만 수잔은 여전히 불안전했다.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의 친구 21살 차이가 나는 앙드레 우터와의 스캔들이었다. 우터와 만나 1909년 결혼을 했을 때의 수잔의 나이는 49세, 새신랑 우터는 28살, 그리고 아들 모리스는 31세였다.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동거를 ‘저주받은 삼위일체’라고 불렀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반발로 우터는 전쟁터로 나가게 된다. 전쟁에서 다리를 부상당해 돌아온 우터는 더 이상 수잔을 아름다운 여성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50대 사랑은 허망하게 식었고, 부부의 관계는 그 무렵 명망 높은 컬렉터 덕분에 인기를 끌게 된 인기 화가 수잔과 판매하는 딜러 우터로 점차 변했다. 결국 우터와는 1926년 이혼한다.
나는 내 삶을 지키려고 필요한 고집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수잔의 인기는 높아지며 전시회 및 작품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모델에서 예술가로 거듭나는 순간까지 많은 남성들과의 스캔들을 벌였고, 사생아를 낳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했고, 남성 화가가 주류인 사회에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더는 남성 화가에 손에 피어나는 한 떨기 꽃송이가 아닌 자신의 평범한 일상과 노화된 피부, 쳐진 가슴, 늘어난 뱃살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삶을 살아낸 여성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나는 내 삶을 지키려고 필요한 고집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화가들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수잔의 생의 마지막 전시는 1937년 프티 팔레 여성 화가들 전시에 다른 여성 화가들의 작품들과 나란히 걸렸다. “하느님이 나를 프랑스 최고의 여성 화가로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라고 벅찬 감동을 말한 수잔은 69살에 신장질환을 진단받고 73살인 1938년 4월 7일 뇌줄증으로 눈을 감는다.
수잔 발라동의 작품 속 눈빛은 주어진, 어쩌면 무례한 타인의 기준에서 정답이 정해진 삶을 똑바로 응시하며 ‘난 이렇게 살아냈어요. 당신은요?’라고 되묻는다. 삶을 지키려고 필요한 고집을 가지고 자신만의 색을 칠한 그녀의 모습은 강인하고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