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dion Feb 25. 2021

Cold Turkey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수린은 웃었다. 얼굴은 태연한 척 미소를 띄워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주의력을 발휘해서 이 사람의 책상 밑을 살핀다면 불안하게 떨리는 하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금단현상이 반감기를 넘어서 왈칵 쏟아지는 순간이다. 수린은 지금 출근할 때 가방에 넣어둔 주스병을 꺼내고 싶은 욕망에 키보드 위의 손이 미세하지만 연속적으로  움찔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컬러풀한 로고가 박힌 시중에서 파는 페트병에 담긴 평범한 과일 주스 안에 사실은 전체 용량의 반 정도가 알코올로 채워져 있음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왠지 주스병을 남들이 보는 앞에서 꺼내는 일은 도둑이 제발 저려하듯 꺼려지는 것이었다. 결국 수린은 지금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차선책을 취하기로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살짝 머리를 돌려 에스더에게 말했다.

"커피 드실래요?"
"설탕 둘에 우유."

수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옆에 늘어선 칸막이마다 고개를 거북이처럼 하고는 모니터에 붙박인 사람들의 등 뒤를 지나쳐 탕비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는 개수대의  수도꼭지를 꺾어 물을 틀었다. 그리고 멍한 눈으로 우두커니 물줄기를 응시했다. 자신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아리고 온몸의 근육이 뻐근하고 허리에 힘이 빠져서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물리적이지 않은 데서 오는 통증이었다. 마치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려 그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드나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말할 수 없이 헛헛하고 공허한 감각이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수린은 손을 뻗어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얼굴에 문질렀다.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조퇴를 할 수도 없었다. 대충 둘러대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내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일도 그다음 날도 이 뻥 뚫린 가슴이 어떻게 고쳐지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물을 받아 넣고 커피메이커의 전원을 눌렀다. 바로 옆에 놓인 인스턴트커피를 집어 들지 않은 이유는 시간을 더 벌고 싶어서였다. 조금이라도 현실의 리듬에서 비껴서 서 빈틈을 누리고 싶었다.

알코올, 탄수화물, 카페인, 니코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물질 흡입이라면 현대인 누구나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일이었다. 수린이 느끼는 가시지 않는 텅 빈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 대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그런 일들이 필요했다. 물론 이 행동으로는 결코 통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이걸로라도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급선무였다.

그가 커피메이커의 불빛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탕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수린의 옆 자리에 앉는 요한이었다.

"커피 아직이에요?"
"네?"

요한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반문한 지 몇 초 후에야 이 상황에 대한 평가가 수린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매우 순식 간에 언어를 넘어서는 직관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를 연료로 갑작스럽게 있는지도 모르고 녹이 슬어있던 그 안의 뇌관에 화약반응이 일어났다.

"저한테 커피 맡겨 놓으셨어요?"
"네?"

요한의 얼굴 위에 떠오른 당황의 기색을 보면서 수린은 작은 통쾌함을 느꼈다, 뒷일 따위는 생각좌 나지 않았다.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가 탕비실 안을 가득 메웠다. 주룩, 추출된 커피가 포트 안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침묵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요한의 긴장해있던 얼굴 근육이 스르르 풀어지더니 눈동자 속에 알 수 없는 평온이 깃들었다.

"그냥, 수린 씨가 불편해 보이 셔서요. 어디 아프신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어요. 오지랖이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어딘가 달라 보였어요. "
"그래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오늘 약간 예민해진 것뿐이에요. 기분 나쁘게 쏘아붙였다면 죄송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 말을 하며 수린은 웃어 보였다. 그가 사실 스스로의 행동이 어리석었다며 후회하고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 밝음이었다. 이렇게 말하면서 수린은 커피메이커를 살피는 척 더 오른쪽으로 몸을 옮겼다. 요한을 최대한 자신의 펄스널 스페이스로부터 멀리 떼어내고 싶은 의식 아래의 본능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와 동시에 더더욱 자기 자리에 두고 온 주스병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당장 자리로 성큼 다가가 주스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내용물을 들이켜면 시원함과 함께  척추를 타고 기분 좋은 싸함이 몸을 감싼다. 그러면 비록 가짜이지만 남은 하루를 버틸 새 기운이 솟아날 것이다. 수린은 갈증을 느끼며 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수린 씨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무례하게 말해서 죄송해요."

수린이 컵의 세척상태를 확인하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이 탕비실의 문이 닫혔다. 그러나 수린은 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세심하게 설탕과 우유의 비율 맞추기를 끝내고 마침내 준비가 끝났을 때 수린은 개수대 왼편에 놓인 물체를 발견했다. 노란 포장지의 초코바 위에 하늘색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른다(Tomorrow is another day)'

수린은 웃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습작 0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