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응답하라 1994
사람이 외롭고 막막하면 제일 기본적인 것이 주는 행복감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런 이유로 뉴욕에서는 집이 나에게 무척 중요했다. 뉴저지 사무실이 내게 주어진다고 한 이후로 뉴저지와 뉴욕을 돌아다니며 한여름에도 마음이 늘 서늘한 건 내가 편히 쉴 집이 없어서였다. 집을 구하기 전 나는 호텔에서도 살고 소개로 알게 된 한국인 아가씨의 방하나를 빌려 살기도 했다. 서블렛(sublet)이라고 하는데 렌트를 한 집 전체를 사정이 있어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하기도 하고 렌트비를 절약하기 위해 남는 방을 빌려주기도 한다. 8월의 폭염에 에어컨이 없는 방에서 미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과연 맞는 선택일까를 고민하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버그 베드포드 에비뉴 역의 4거리 코너 집이라 버스 소리, 쓰레기차, 사이렌 소리로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편안한 내 집에 대한 갈망은 더 깊어졌다.
두려움과 고민에 휩싸여 세상 제일 힙하다는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서 그 동네 바이브를 즐길 엄두도 못 낸 채 구독료만 내고 이용을 잘 안 하던 넷플릭스를 보게 되었다. ‘응답하라 1994’. 그 명성은 익히 들었었던 터이다. 90년대 연세대학교를 다닌 내 동기들은 극의 주변장치만으로도 추억을 되살리며 열광했고 나보고 꼭 보라고 했었는데 3~4년이 지나도록 나는 그 드라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데다가 바쁘기도 참 바빴다. 우연히 보게 된 철 지난 드라마에서 나는 인상적인 캐릭터를 만나고서 그 드라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김성균 배우가 연기한 삼천포였다.
첫 회에서 그는 기차로 서울에 상경하여 신촌 하숙으로 오게 된다. 전화로 주인아주머니가 오는 길을 알려줬는데, 그 이정표들이 귀에 박힌다. 그레이스백화점, 형제갈비, 독수리다방. 나에게는 당장에라도 바로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삼천포는 잘 올 수 있다고 호언장담 해놓고는 마구 헤매기 시작한다. 그도 삼천포에서는 뭐든 잘 해냈으리라 본다. 내가 서울에서 잘 해냈듯이. 서울말을 흉내 내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가 지방에서 왔음을 알아챈다. 내 영어 첫음절에 뉴요커가 보내는 눈빛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갈아타는지 몰라 시청 역을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신촌역에서는 출구 찾기 지옥을 경험한다. 모든 사람이 너무 잘 아는 것을 나만 모를 때, 그런데 이런 난감한 경험이 전에 별로 없었던 사람은 피로감을 두배로 느낀다. 택시기사에게 바가지를 당하기 까지 하는데, 이 세상 제일 바보 같은 나를 나의 가족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응원하고 있다. 나의 상황과 모든 면에서 맞아떨어짐을 느끼며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이 지나면 삼천포도 나도 제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설고 당황하고 지치면 더 깊은 좌절만이 있을 뿐이다. 마침내 하숙집에서 그는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된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예전의 삼천포에서의 똘똘함을 되찾는다. 정신없이 드라마를 정주행 하면서 나에게는 응답하라 1994의 주인공이 쓰레기와 나정이가 아니고 삼천포였었다. 나도 그처럼 헤매더라도 집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집을 알아보는 앱(streeteasy, zillow 등등)에 나오는 집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그중에 몇 곳은 오픈하우스 미팅을 신청하고 가보는 것의 반복이었다. 늘 조건이 잘 안 맞았고 좁고 시끄럽고 살짝 무서운 곳도 있었다. 크레딧이라는 것이 없어 누군가 나를 위해 보증을 서야 한다는데 보증은 절대 서지 말라고 배워 왔고 또 알고 있기도 하고 게다가 아버지의 대출을 보증서는 바람에 평생을 고통받은 남편과 사는지라 보증은 듣기만 해도 끔찍한 단어여서 남한테 부탁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방법이 거의 없는 듯 보였다. 미국에서의 수입이 아직 없고 크레딧점수도 없고, 보증인도 없고 단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돈이 은행에 좀 있을 뿐이었다. 그건 미국 집주인들은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비싸지만 안전해 보이는 콜럼버스 서클 근방의 아파트는 눈이 돌아가게 비쌌지만 동네가 안전하고 편리해 보였다. 용기 내어 더 진전을 시켜보려고 했는데 브로커란 사람이
"아직 동양인에게 렌트를 준 적이 없는 집인데... 보드멤버가 나를 받아들일지 확신할 순 없지만 심사를 위한 서류를 제출할 수는 있다"고 알려주었다.
"대신 심사비는 300불이고 결과에 관계없이 돌려주지 않는 돈이야. 괜챦겠니?"라고 한 마디 더 했다.
나는 속으로
'됐거든요. 가뜩이나 좁은 집에 계속 페인트를 덧칠하여 페인트 두께만큼 더 좁아진 것 같아 보이는 집인데 뭐가 그리 잘났냐?'라고 생각하고 겉으로는
"다른 집도 보고 검토한 후 연락줄게"라고 말하고 브로커와 활기찬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하나 더 기억나는 일이 있다. 집을 알아보러 가느라 주위를 둘러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Upper west80 가인가 90가 정도였던가? 내가 10년 이상 살았던 목동과 비슷하여 동네가 정감이 갔다. 아파트들과 놀이터, 그리고 생활 편의 시설들. 한참을 둘러보며 오픈하우스인 집을 찾고 있는데 서 너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아빠에게 묻는 말이 들렸다. “아빠, 저 사람들은 왜 여기 있어?”아이 아빠가 대답하기를 “여기 사는 사람들은 아냐. 빈집이 있어 보러 왔나 봐” 그냥 흘려들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방인의 고독을 심하게 앓고 있는 나로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게 확실하구나. 아이들 눈은 속일 수 없지’ 동네는 좋아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움찔했던 나는 그 동네의 집과 인연이 닿지 않았다.
마침내 내가 구한 집은 허드슨 강변 산책길이 바로 인근에 있고 창문 밖으로 항상 푸른 나무들이 있는 오래됐지만 관리가 매우 잘된 아파트였다. 나는 너무나 만족했다. 내가 맨해튼에 원베드룸 아파트에 기거하게 되다니 그것만으로도 그저 멋져 보이지 않은가.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돌아오면 언제나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나의 스위트홈! 여기서의 생활은 3년 정도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