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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udentJ Apr 11. 2021

뉴욕 센트럴 파크의 추억

2017년 뜨거운 여름날

별로 여유 없는 인생을 살아온 나 같은 사람은 여름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다. 다른 사람들은 매년 호화스럽지는 않아도 아이들을 데리고 산과 바다, 그리고 계곡으로 휴가를 가기도 하던데 나에게는 마음먹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싶기도 하고 잠시 짬을 낼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작은 아이가 대여섯살이 되던 해에 바닷가를 잠깐 다녀온 기억이 있고 그 이후로는 여름 휴가의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니 여름 휴가 없는 세월이 거의 15년 정도나 된 것 같다. 


2017년 여름 나는 미국으로의 이주를 염두에 두고 가능성을 타진하러 뉴욕으로 갔다. 맨하탄과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 머물며 이것저것을 알아보고 있었다. 여름에 다른 나라에 왔고 회사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휴가라 할 수도 있지만 홀가분하게 관광지를 다닐 여유도 없고 해외 여행은 출장 말고는 가본 기억이 별로 없던 터라 관광이라는 것이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랐다. 그리고 휴가 왔으니 호탕하게 써보자 할 만큼의 여비도 없어서 지갑 상황을 늘 체크해야 했다.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참 많이도 다녔다. 아는 지인들에게 뭐라도 물어보려면 기꺼이 내가 그들이 편한 장소로 이동해야 했고 사업가능성, 정착할 집등을 알아보느라 소득도 없이 몸과 맘이 늘 바빴다. 덥기는 또 왜 이리 더운지. 사실 맨하탄은 거리는 좀 지저분해도 공기가 맑다. 바닷가가 가까워서 그런지 깨끗한 공기덕에 햇볕은 더 강해서 10년치 기미가 열흘만에 만들어질 기세였다. 차도 없고 퀴퀴한 냄새의 지하철로 이동하며 극기훈련 비슷한 하루하루가 지나는데 운이 나빠 지하철의 에어컨이 고장 나기라도 하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덥고 지칠 때 나를 위로해주는 건 델리에서 파는 컵수박이 유일했다. 5불 정도로 테이크아웃 커피잔 정도에 담겨있는 수박을 길에 서서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참 땀 흘린 후 먹는 수박국물은 바로 내 몸에 흡수되는 신비한 생명수 같았다.


또 하나 더 나를 위로해 준건 뉴욕의 심장 센트럴 파크다. 뉴욕을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르는 곳이 센트럴 파크이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방문했다가 잠깐 들를 수도 있고 유명한 마차를 타고 공원을 한바퀴 둘러보는 관광객만의 특권을 누려볼 만도 하다. 센트럴 파크는 많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주변의 아름다운 집들을 볼때면 ‘저런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얕은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참 많이도 돌아다닌 날이었다. 콜럼버스써클 근처의 피자집에서 값이 싸지만 양은 많은 피자 한쪽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어디 좀 앉아보려고 센트럴파크에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갈 돈이 아까운, 쉴 수 있는 의자가 필요한 관광객의 선택이었다. 발을 공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기온이 2~3도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촉감으로 인지된 기억이 많지 않은데 나는 온몸으로 그때를 기억한다. 아마 내 느낌이 맞을 거다. 내 옷 중에 제일 시원한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고도 더워서 헉헉대는 중이었으니 내 피부는 온도에 무척 민감했다. ‘아! 이건 뭐지? 공원이 이런 건가?’ 나는 너무나 매력적인 이 공원을 더 느끼기로 하고 이후에 대충 잡아 놓은 일정을 내 머리속에서 지웠다. 물론 얼마든지 취소 가능한 나만의 일정이었다. 나는 그날 마치 나를 반기는 듯한 센트럴파크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후원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의자에도 앉아보고 물고기 거북이들이 가득한 호수도 한번 들여다보고, 마라톤 선수의 풍모를 보이는 달리는 뉴요커들도 구경했다. 구글맵으로 들여다보니 넓이가 한번에 돌아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날 내 컨디션이 되는 만큼 최대한 공원을 걸었다. 구경하러 온 관광객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살 곳이 될 수도 있는 도시에서 느꼈던 철저한 이질감을 잠시 잊게 해준 곳이었다. 지칠 때까지 돌아다니다 보니 어둑어둑 해져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센트럴파크에 대해 구글에서 찾아보는데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섬뜩한 이야기가 있다. 조깅을 하다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던 여성의 이야기였다. ‘Central Park Jogger’라 불린 메일리라는 여성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낮 동안 그렇게 찬란하던 공원이 밤에는 무섭게도 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오래 머물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알게 되어도 센트럴 파크에는 또 가고 싶었다. 


이후에도 나는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꼭 센트럴 파크에 들렀다. 거의 매일 들르다시피 하면서 한달쯤 지났을 때 나는 아직도 내가 못 가본 길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매번 다른 곳을 갔는데도 내가 가본 곳은 센트럴 파크의 극히 일부분이었다. 내가 센트럴파크를 한번 가본적이 있다 해도 나는 센트럴파크를 경험한 거다. 하지만 내가 신이 나서 아무리 열심히 그곳을 갔어도 나는 그곳을 완벽히 알지 못한다. 게다가 나는 이곳의 여름만을 경험했을 뿐이다. 그동안 회사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업계 전반에 대해, 왜 이렇게 더디게 변화할까 조바심을 가졌던 내가 떠올랐다. 시간이 필요한 거였는데… 그것도 오랜 시간이 말이다. 조금 알고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게 아니었다. 

마냥 걷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벤치에 앉아 잔디에서 해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공기도 좋고 새소리도 좋은 곳에서 나는 내가 혼자임을 알고 좀 우울했었다. 진정 내 옆에 누가 없음이 느껴지는 때는 햇빛이 가늘게 쪼개져 내리는 좁은 오솔길 앞에서였다. 너무 예뻐서 한 발 내딛었다가 움찔했다. 무서웠다. 환한 낮이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통행하는 대중 공원인데 왜 무서운 마음이 드는걸까? 나는 원래 겁이 많았었나? 길 입구를 서성이며 조금 생각에 잠기고 난 후 나는 깨달았다. 

언제나 용감하다고 자부했던 나는 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나를 용기 있게 해준 건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었다. 대낮에 사람 많은 공원에서도 한 걸음을 떼지 못하는 겁쟁이가 용기 있는 척을 하는 걸 눈감아 준 많은 얼굴이 떠오르며 햇빛이 부서지는 좁은 길은 잘 안 보이고 뿌옜다. 가족이 그리워 살짝 울었나보다.


떠나 보는 것은 괜찮은 일이다. 공간이 달라졌다는 것만으로 내가 새로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 공간에 대한 추억이 별로 없던 나에게 센트럴파크는 강렬한 위안을 주었고 깊이 있는 인생을 생각하게 해주었고 가족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아직도 가보지 않은 센트럴파크의 장소가 많이 남아 있듯이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도 무한대로 남아 있다. 또 다른 센트럴 파크를 만날 것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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