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가 소울푸드가 되기까지
2017년 가을 큰 가방 2개에 짐을 넣어 뉴욕으로 왔다. 1년 전만 해도 생각지도 않았던 나의 뉴욕행은 코트라가 뉴욕에 마련해 놓은 수출기업 인큐베이터 사무실에 우리 회사가 입주할 수 있는 자격이 되어서였다. 힘들게 1년에 2번씩 짐을 꾸려 트레이드 쇼에 참여해 왔던 나로서는 이제 진짜 뉴욕에 우리 회사의 근거지가 생긴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할 사항이 많았지만 회사로서는 미룰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또 나 개인은 유연한 사고를 가진 개체이지 않은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거야 사표를 내면 되고 한국의 회사는 원격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리라 생각되었다. 게다가 워킹맘으로 항상 동동 거리며 살던 나는 마침 올해 작은 아이까지 대학의 문을 통과한 상태라 육아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갔으면 성인인데 엄마의 할 일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나 더 대학원에 다니는 중이었는데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과감히 휴학! 이로써 나의 한국 생활 정리는 마무리되었다.
여름에 와서 집도 마련했다. 드디어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다. 그러나 몇 가지 좀 변수가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의 하나는 코트라가 뉴욕사무소라고 고지했던 사무실은 내가 알던 것과는 달리 뉴욕 맨해튼이 아니라 뉴저지였다. 지리적으로는 그리 멀진 않은데 내가 익히 알던 대로 지하철로 다니는 그런 곳이 아니란다. 여기서부터 고행은 시작되었다.
일단 뉴저지는 대중교통이 맨해튼과는 다르다. 우리 집에서 사무실이 있는 Fort Lee로 가려면 Gorge Washington Bridge로 건너가는 게 좋은데 NJ transit 버스를 타야 한다. 뉴저지의 버스가 내가 아는 서울의 버스와 다른 점이 (실은 나는 2004년 서울의 버스 체계가 바뀐 이후 번호가 낯설어 버스를 거의 타지 않았다.) 몇 가지 있다.
첫째, 버스요금을 크게 3구역으로 나눈 것 같은데 처음 타는 사람은 나의 목적지가 몇 구역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버스표 자동판매기에 정보가 있기는 하지만 지도 위에 표시된 정보는 없으므로 정류소의 이름을 알지 못하면 몇 구역인지 알 방법이 없다. 내 경우 내가 내리는 정류장이 첫 번째 여서 1구역인 건 하루만 헤매고 알아냈지만 2구역과 3구역의 기준을 안 것은 몇 년이 흐른 후이다. 처음 사무실은 찾아갈 때는 첫 번 정류장에 2구역 요금을 내고 내리고 돌아올 때는 2구역에 해당하는 정류소에서 타고 나왔다. 친절한 버스 운전수가 1구역 정류소를 알려주어 다음부턴 잘할 수 있었다. 아직도 모르는 부분은 나는 출발점에서 타니 알기가 쉽지만 중간에 타서 내리는 사람은 어떤 계산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두 번째, 버스 정류장 표시가 너무 작고 아주 위험해 보이는 길가에 있으며 버스는 언제 오는지 알 방법이 없다. 뉴저지의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기보다는 자동차를 위한 길로 보여서 때로는 내가 버스를 타러 터덜터덜 걸어가는 이 길이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맞나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한 번은 뉴저지 안쪽에서 버스를 타고 내가 사는 맨해튼으로 돌아오는데 날이 어두워졌다. 칠흑같이 어두운 길가에서 버스를 타겠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 것과 아무 표시도 없는 곳에서 자기가 내릴 곳을 찾아 내리는 사람들이 너무 신기해 보였다. 당연히 버스 안에서 다음 정차할 곳의 안내방송 같은 건 없다. 미국에서 태어나 쭉 뉴저지에 사는 분께 도대체 어떻게 밤에 버스 정류장을 찾느냐고 불어봤다. ‘아마 여러 번 잘못 내렸겠죠’라고 답해줬다.
회사 설립을 위해 변호사 미팅을 하러 사무실을 찾아갈 때 한국의 중소도시를 연상케 하는 뉴저지의 어느 곳을 찾아가면서 많이도 버벅대었던 것 같다. 내가 좀 촌스럽다고 느낀 이 거리는 나중에 알고 보니 뉴저지에서 내로라하는 핫한 거리였다. 많아진 생각에 무거운 기분으로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데 택시를 예약하셨나고 물어봐서 당당하게 버스를 타겠다고 대답했는데 나중에는 그 말을 후회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까운 버스 정류장까지는 20분 정도 걸어야 했고, 그 날은 30도를 훨씬 넘는 쨍한 여름날이었다. 게다가 버스 정류장을 찾기 위해 대여섯 사람에게 길을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 영락없이 하이웨이 갓길 같은데 있는 버스정류장을 찾는 데는 지칠 만큼 시간이 걸렸으며, 겨우 도착한 버스정류장에서도 도대체 버스가 오기나 하는 건지 걱정하며 기다렸다.
너무나 간단한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이렇게 알아야 할 것이 많고 지친다는 사실에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앞으로 알아야 할 것은 그럼 어느 만큼이란 말인가? 그냥 하루에 딱 하나씩만 일을 처리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오는 날의 계속이었다. 힘도 들고 먹는 것도 부실한 나날들이었다.
미식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비싸고 좋은 음식을 매번 사 먹을 수는 없는 일이고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델리에는 수많은 음식이 있었지만 입이 짧아 채소나 고기를 토르티야에 돌돌만 랩은 싱겁고 샌드위치는 너무 리치 했고 베이글은 질기기만 했다. 구글맵을 들여다봐도 알쏭달쏭하기만 한 길을 헤매다가 나는 뉴저지 포트리에서 운명의 식당을 찾았다. 몸도 마음도 허기진 상황에서 들른 ‘명동칼국수’. 거기서 먹은 칼국수는 ‘나도 여기 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 힘을 주었다. 갈 만한 식당을 하나 찾고 나니 사는데 자신감이 생겼다. 그 집 명물 반찬인 백김치는 내가 하도 많이 먹어서 서빙하시는 분이 내 빈그릇을 채워 주시느라 좀 분주했었다. 이후에 종종 나는 뭔가 에너지가 필요할 땐 칼국수를 먹었다. 자연스레 내가 가진 첫 느낌을 기억하며. 명동칼국수에선 팁에 좀 너그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후에는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인지 맘에 드는 식당이 여럿 생겨나기 시작했다.
낯선 음식에 대한 경계도 유난히 많아 그걸 깨기가 힘들었는데 우연히 들른 브루클린의 西安名吃 Xi'an Famous Foods는 강렬한 맛에도 불구하고 쾌감을 주었다. 이후 이 식당이 중국 정통 사천음식으로 꽤나 성공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모마뮤지엄 앞에 언제나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할랄 가이즈의 푸드트럭도 한번 도전해봤다. 나는 이제 서서히 눈으로 입으로 모든 감각으로 낯선 것을 정복해 나가게 되었다. 이슬람인은 할랄푸드를 고집하고 유대인은 코셔 푸드를 먹으려 하고 나는 한식을 고집한 것이었을까? 나는 종교적 걸림돌도 없으니 다양하게 도전해봐도 무방하리라 이제는 지인이 뉴욕을 방문한다 해도 맨해튼과 뉴저지 포트리를 누비며 안내할 식당의 목록이 꽤 된다
맵고 짠 음식을 안 먹어도 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내 몸이 적응하는 걸 느끼니 내가 여기 진정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뿌듯했다. 고생을 해도 먹으면 산다. 다 살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