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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udentJ Apr 11. 2021

리버사이드의 추억

걷기 예찬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 땅에 정감이 가지 않았다. 친구 중에 하나는 외국에 유학을 갔다가 정착했는데 비행기에서 처음 내리자마자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그 친구에게서 여러 번 들었던 터라 출장차 많이 와봤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뉴욕에 내가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기대보단 걱정이 훨씬 컸다. 심지어 이주를 결정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 계획을 말해주었을 때 얼마나 들 부러워하던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주변에 디자이너들은 뉴욕에 대한 추억을 모두 가지고 있고 뉴욕이라는 곳과 한 번쯤 연이 안 닿은 사람이 없을뿐더러 아직까지 가본 적이 없더라도 언제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장소 1순위로 뉴욕을 꼽았다.

도대체 뭐가 그리 좋았을까? 사람들마다 뉴욕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슷한데 뭔가 멋지다는 것과 영화의 배경이 되는 거리의 모습, 쇼핑 등등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패션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인테리어 용품이나 소품을 파는 매장에서는 자료조사를 하는 느낌이어서 그 자체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없었다. 뉴욕의 레스토랑도 여행의 즐거움에 큰 몫을 차지하는데 미식가도 아닌 데다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뉴욕 레스토랑 탐방이 적어도 나에겐 중요한 경험이 아니었다. 맨해튼에 아파트를 얻어 혼자 살러 간다는 말만으로도 주위의 40대 여성들은 진심으로 부러워했고 부푼 기대로 들떠 있지 않은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나는 맨해튼 서쪽 편 위쪽 157st에 강변에 집을 얻었다. 방 하나, 거실, 부엌, 화장실의 원베드룸 아파트였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운치가 있고 창문을 열면 바로 숲이 보이는 것이 난 무척 맘에 들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나도 맨해튼의 거리와 상점 또는 장소들이 익숙해지고 도시의 곳곳을 다른 뉴요커들처럼 알게 되었다. 사실 맨해튼은 워낙 작은 땅이고 가로와 세로의 길로 바둑판처럼 나누어진 계획도시라 더 빨리 알게 된 것도 있을 것이다. 맨해튼을 많이 알게 되었을 때도 나는 복잡한 타임스퀘어나 5번가 보다는 우리 집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리버사이드 산책길이 좋았다. 뉴저지를 마주 보며 허드슨강이 흐르는데 허드슨강가는 서울의 한강의 고수부지와는 달라서 물이 배우 가깝다. 아마 한강처럼 홍수가 나서 범람하는 일이 잘 없는지 강둑을 잘 단속해 놓지도 않았다. 그저 돌무더기가 좀 있을 뿐이고 거위 때가 언제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집에서 워낙 가깝기도 했지만 리버사이드는 내가 맨해튼을 내 집으로 여기게 하는데 제일 큰 역할을 했다. 인공적인 느낌이 거의 없는 이 길은 맨해튼 외곽을 모두 돌아 나 있을 거다. 물론 가보지는 않았다. 자전거를 이용한다면 서쪽 내 집에서 출발해서 남쪽으로 그리고 동쪽 방면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동에서 서로 횡단(센트럴 파크를 가로지르면 더 좋겠다)하면 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리버사이드 길은 72st 까지는 브로드웨이와 몇 블록 떨어지지 않고 나란히 있어서 조금 걷다가도 브로드웨이 쪽으로 나가면 거리거리마다 상점이 있어 꼭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그때그때 생각나는 곳에 들르기에 좋다. 116st의 콜롬비아대학 근처에서 쉑쉑 버거 같이 대학가 주변의 느낌을 받는 가게에 갈 수도 있고, 유명한 쿠키가게도 들를 수 있다. 먹을거리가 없다면 72st의 대형 슈퍼에 들러도 좋겠다. 어느 만큼 갈지 정하지 않아도 가볍게 집을 나서 강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 나는 지금도 제일 그립다.


리버사이드 길을 처음 탐색하러 가는 것도 나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우선 뉴욕은 안내판이 그다지 잘 되어 있지 않고 혹시 길을 잘못 들까 봐 걱정도 되어 가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곳이 낯선 나라이다 보니 혹시 내가 가면 안 되는 곳인지도 알 수 없었다.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내디딘 나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마침 일요일 오후 석양이 지려는 시간이라 허드슨 강가는 참 아름다웠고 가족단위로 나와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자니 미소가 지어졌다. 뭘 그리 많이도 싸들고 나와서는 연기를 내며 요리를 하고, 먹고 즐기는 중이었다. 음악을 시끄럽게 틀고 아이들은 정신없이 놀았다. 서울의 고수부지였다면 혹시 신고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서울처럼 강가 고수부지에 최첨단 시설의 편의점이 없으니 사람들은 이삿짐 수준으로 피크닉 용품을 싸들고 나온다. 테이블, 의자, 그릴, 먹거리, 음악을 위한 스피커 등등.

나는 강가로 나갈 때마다 조금씩 더 가보았다. 궁금해서다. 아무리 조금 더 가는 것이라도 안 가본 길을 갈 때는 주저되고 겁이 났다. 하지만 한번 갔던 길은 이미 나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길 옆의 다른 것도 보인다. 처음 시도가 늘 어렵다. 이후로 나는 뭐든 처음 해보는 거라 덜컥 겁이 날 때는 허드슨 강가 리버사이드를 떠올린다. 나의 안전지대였던 서울에선 완벽한 첫 느낌을 경험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리버사이드는 완벽히 처음 경험하는 것들로 가득했지만 나의 최애 장소가 되었다. 나는 지금 너무 안전하고 익숙한 곳에서는 느끼지 못할 스릴에 대해 얘기하는 중이다.


리버사이드 120st정도의 fairway마켓도 좋았다. 외진 곳이라 사람들이 잘 안 올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극심한 맨해튼의 임대료보다는 좀 저렴한 가격에 넓은 매장을 가진 식료품점으로 신선하고 종류가 다양한 식재료가 비록 1인 가구인 나도 강하게 유혹했다. 한국에서 지인이나 가족이라도 올라치면 핑계 삼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fairway마켓에 꼭 들렀다. 소스도 이것저것, 치즈도 이것저것, 커피도 이것저것 되는대로 사다가 먹어보다 보면 각각 다른 맛과 풍미가 내가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가끔은 조깅을 한참 하고 허기가 져서 들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공복에 쇼핑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잊고 나는 힘도 없고 집까지 짊어지고 걸어가는 수밖에 없는데도 먹을 것을 사는데 욕심을 낸다. 그런 날은 집까지 가면서 미련한 자신을 얼마나 책망하게 되는지… 집에 도착해서는 사온 먹거리를 팽개치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 버린다.

이국적인 먹거리도 좋지만 가끔은 아는 맛이 그리울 때가 있다. 굳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음식 중 하나가 한국 식빵이었다. 고맙게도 한국의 파리바게트, 뚜레쥬르 등이 맨해튼 여러 곳에 매장을 내서 사 먹는데 문제는 없지만 우리 동네에는 없어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다. 대단한 음식도 아니지만 먹고 싶은 식빵을 먹지 않으면 타향살이 설움이 복받쳐 오를 것 같아 나는 어느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 M4버스를 탔다. 음악을 들으며 도착한 72st 파리바게트는 그날따라 장사가 잘 되었는지 식빵 종류가 모두 팔리고 하나도 없었다. 물론 미국에 빵은 많다. 하지만 나는 한국식 보드랍고 달콤한 식빵이 먹고 싶었다. 이거 하나 먹자고 옷 갈아입고 버스 타고 온 나도 어이없고 또 식빵이 다 팔린 것도 서러웠다. 사람이 외로우면 원래 별일 아닌 일에 서러운 법이다. 속상하고 속상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게 웬일인가 리버사이드로 통행하는 M4버스 안에서 나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석양을 보았다. 비록 빈손으로 돌아가는 중이지만 나는 내가 지금 이 시간에 버스 안에 있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는 일도 별로 없지만 대부분은 지하철이 빠르니까 지하철을 탄다. 하지만 주말이기도 하고 해서 버스를 탔던 것인데 이런 광경을 볼 줄이야. 살구빛과 초콜릿색이 잘 어우러진 허드슨 강가의 석양은 지금도 바로 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풍경이다. 어떤 나쁜 일이 꼭 나쁘게만 마무리되란 법은 없나 보다. 기분은 이미 다 풀렸고 식빵은 다음에 먹어도 된다.


차를 타고 다니면 보이지 않는 것이 걸으면 보인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사실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곳도 많다. 뉴욕주와 바로 붙어 있는 뉴저지만 해도 그렇다. 모두 차를 타고 다니고 심지어 인도를 찾기가 애매한 길도 있어서 차들의 도로에 혼자 걸어보면 무장을 한 기사들 사이에 벌거벗고 있는 나약한 존재와 같은 느낌이 든다. 일반적인 미국에서 와는 달리 맨해튼은 걸을 수 있다. 걸어야 더 멋지다. 맨해튼 안쪽의 화려한 길도 좋지만 내가 걷기 좋아했던 리버사이드를 걸으며 난 사람도 구경하고, 이 땅에 자라는 식물도 관찰하고, 도로의 체계, 그리고 버스의 노선도 알게 되었다. 사실 외국에서는 지하철보다는 버스가 좀 난이도가 있는 편이라 처음 한동안은 집 앞에서 타는 버스만 주로 타고 도착지점도 언제나 같은 곳만 이용했었는데 걸어 다니다 보니 버스도 더 잘 이용하게 되었다. 맨해튼만 다니는 M버스, 브롱스의 Bx, 브루클린 B, 그리고 퀸즈의 Q. 물론 구글맵만 보면 잘 찾을 수 있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은 전체를 파악하고 간간히 구글맵의 도움을 받는 것이 훨씬 마음이 놓인다. 걷기가 나를 이 도시에 대해 안심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리버사이드를 걸으며 제일 많이 만난 사람들은 히스패닉인 들인 것 같다. 특히 72st북쪽의 리버사이드는 확실히 그렇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현실 중의 하나가 인종 간의 직업군이나 사는 동네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거의 다 한국인만 사니까 느낄 수 없었던 문제가 뉴욕처럼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면 눈에 보이게 된다. 히스패닉은 주로 노동층의 일을 맡는 경우가 많다. 그분들은 힘들이 좋으신 게 분명하다. 한인식당에 가면 주문은 한국인이 받고 테이블을 치우는 일은 히스패닉이 맡는다 한인타운에서 유명한 순두부집은 밥은 돌솥에 주고 순두부는 뚝배기에 주는데 4인 식탁을 치우는데 4개의 돌솥과 4개의 뚝배기, 그리고 각종 반찬 그릇과 컵을 2층으로 된 쟁반에 담고 한 손으로 주방으로 나르는 히스패닉 남자분을 봤을 때 마음속에서는 ‘브라보!’라는 감탄이 나왔다. 내가 주로 담당하는 소품샵의 가게 주인들이나 바잉 담당은 주로 백인이고 여성이 많다. 흑인을 본 것은 손에 꼽는다. 그냥 그렇게 구분되어 있다.

주중에 힘든 노동을 했을 그분들은 주말이면 리버사이드 강가에 온갖 살림을 가지고 나와 펼쳐 놓고 실컷 즐긴다. 원래 흥도 많고 정도 많은 그들은 맨해튼의 넓지 않은 아파트보다는 탁 트인 강가가 당연히 더 좋을 거다.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이 좋고 그들의 음악이 좋고 연기 자욱한 바비큐가 정겹다. 음악만 있으면 몸이 반응을 하는 그들을 보는 것도 즐겁고 내심 부럽다. 인종마다 출신 나라마다 사람들의 성정은 다르긴 한 것 같다. 하지만 누가 옳고 그름은 없다. 미국이라는 땅은 기회의 땅이지만 자본이라는 거대한 벽이 삶을 많이 짓누르기도 한다.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이민자나 가난한 사람들은 기회의 땅인 미국에서도 우뚝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 2021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 중 ‘미나리’,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 ‘마 레이니, 그녀가 블루스’ (Ma Rainey's Black Bottom) 등이 모두 자기가 처한 현실을 벗어나가 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힐빌리의 노래에서 로스쿨 학생인 주인공이 여름방학 동안의 인턴직을 얻기 위해 참석한 기업인과의 저녁 만찬에서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서까지 질문하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대상에 대해 거침없이 비꼬는 미국의 중산층들이 한국인인 나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주인공은 백인 남성이고 명문대 로스쿨을 다니고 있었지만 가난한 농부의 상징인 힐빌리 출신이었던 거다. 그도 깨기 어려운 사회적 벽을 이민자들이 깨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리버사이드를 즐기는 분들이 나는 마음에 든다.


리버사이드의 좋은 점 중 또 다른 하나는 pier에 있는 카페이다. 친구가 하나쯤은 있어야 더 좋기는 하지만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혼자라도 잠시 강바람을 맞으며 쉬고 커피 한잔하거나 아니면 저녁 하기 애매한 상황이면 간단한 식사로 저녁을 해결하며 싱글라이프의 매력을 누려 볼 수도 있다. 저녁까지 해결했다면 집에 가서는 따뜻한 샤워만 하면 되지 않은가? 그런 저녁은 마치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걷는 것은 여러모로 좋다. 걷기를 예찬하는 이론도 책도 많다. 나에게 걷기는 도시를 소화하는 저작운동이다.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하다 보면 딱딱하고 질기기만 했던 이질적인 문화가 나만의 방법으로 잘게 쪼개지고 나는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그리고 그 문화는 나에게 양분이 된다. 지금은 잠시 맨해튼을 떠났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가면 좋은 운동화를 신고 더 많이 걸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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