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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Jul 13. 2019

개는 좋아하지만 악어는 무서워요.

나는 석사과정 2학기를 마치고 동물보호시민단체에 입사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괴짜사회학』을 집필한 수디르 벤카테시처럼 책상 앞을 벗어나 ‘살아있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것이 첫 번째였고, 버려지고 다친 동물들을 위해 ‘실천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나는 이따금씩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하루씨, ‘애견의 사회학’ 하신다면서요?”


스스로의 연구를 ‘○○의 사회학’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이 그 분야를 선점하는 방법이라 말하던 몇몇 선배들은 나를 ‘애견 사회학’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지나가는 농담이었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스스로도 내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회학에서는 주로 사회의 '제도, 계층, 문화, 불평등, 권력, 그리고 자본주의' 같은 주제를 연구테마로 삼지만,  나는 석사과정 내내 '반려동물’을 주제로 하는 연구에만 관심을 가졌다. 코스웍을 하는 동안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 '동물'과 관련한 페이퍼를 썼으니 말이다.


동물보호시민단체에서 일을 하기 전 까지는 사실 내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학기말 페이퍼와 비슷한 내용의 칼럼을 대학원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의 앎은 학위논문으로 나아갈 만큼 깊지 않았고, 막연한 문제의식을 구체화 시키기에는 참고할 수 있는 선행연구도 충분하지 않았다.


어느 교수님의 말처럼 ‘사람복지도 제대로 안 되어있는 마당에 동물복지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들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원 생활이 미궁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을 무렵 '동물보호시민단체'에서 활동가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읽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단체에 입사한 이후에도 나의 문제의식은 한동안 반려동물과 펫 산업에 머물렀다. 번식장의 열악한 실태와 그곳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동물학대에 분노했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필요한 사회정책과 캠페인을 고민하면서도 다른 동물들이 겪는 문제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 때 당시에 내가 생각했던 ‘동물보호’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는 ‘동물’은 나의 생활반경에서 ‘네 발로 걸어 다니는 털이 복실한 동물들’뿐이었다.





악어라구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동물보호시민단체에 입사하고 처음으로 구조에 참여한 동물은 ‘악어’였다.


하루씨도 같이 가볼래?”


대표님의 제안에 나는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입사 후 첫 외근이었다. 하루 종일 민원전화만 받았던 터라 몸이 근질거리던 찰나였다.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의 주업무가 '전화받기'일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든 단체에 들어온 제보에 따르면 일산의 한 고깃집에서 살아있는 ‘악어’를 전시한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아무 생각없이 따라나서기는 했으나 구조해야 하는 동물이 ‘악어’였으니 말이다.


선임과 함께 대표님의 차를 타고 일산으로 향하며 주위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악어 구하러 감."


대부분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헐. 악어도 구해야 돼?"

"악어가 널 구하는 거 아니고?"


적어도 나와, 나의 지인들에게 있어서 악어는 ‘정글 숲의 늪지대를 기어 다니는 무서운 파충류’였을 뿐 보호하거나 구조해야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나는 앞서 걷는 대표님과 선임을 쭈뼛쭈뼛 따라갔다.

제보 받은 고깃집에 다다를 즈음,  '아니,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싶은 위치에 세로로 길쭉한 수조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진짜 악어가 있었다.


태어나 처음 가까이에서 본 악어는 2미터가 넘는 몸이 겨우 들어가는 수족관에 꼼짝없이 갇혀있었다.

악어 스스로 몸을 돌리거나 옆으로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협소한 크기였다.


‘살아있나?’


나는 이리저리 돌아보며 악어를 살폈다.

25세 수컷. 이름이 ‘만식’이라는 악어는 숨을 쉬는 박제처럼 가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만식이 (수컷, 2015년 당시 25세)




선임은 내게 수족관에 갇힌 만식이가 CITES 1급에 해당하는 ‘샴 악어’라고 말해주었다.


CITES(Convention on International Trade in Endangered Species of Wild Fauna and Flora)란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을 말하는데 이 협약에서 정한 동·식물을 정부의 허가 없이 임의로 ‘포획, 거래, 사육’해서는 안 된다. 녹조와 분변이 뒤섞인 수족관에서 숨만 쉬고 있던 악어는 멸종위기종 1급에 해당했고, 만식이의 보호자는 명백하게 허가받지 않은 시설에서 악어를 전시하고 있었으므로 환경부의 몰수 조치가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법에서 규정하는 조건을 갖춘 사육시설이 충분하지 않기에 멸종위기종의 동물을 임의로 사육하는 불법 행위가 적발되어도 빠른 시간안에 몰수가 시행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보호자는 오랜 세월 정든 악어를 품에서 떠나보내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였지만 악어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봐도 그동안 만식이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좁은 공간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가혹한 형벌이니까.



그로부터 몇 개월이 더 지났을 때였다.


동물보호단체의 업무에 조금씩 익숙해졌을 무렵. 만식이 구조에 동행했던 선임과 함께 동묘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동물판매거리'에 현장조사를 나갔다. 환경부 소속의 공무원들도 함께였다. 신고가 되어있지 않은 판매점에서 CITES종에 해당하는 동물이 거래되고 있는지 단속하는 차원이었다.  


선임은 내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자신이 가리키는 동물의 사진을 선명하게 찍으라고 말했다. 현장조사의 증거를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있게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우리는 작은 수조가 켜켜이 쌓여있는 가게에 들어갔다.


선임은 능숙하게 가게 안을 둘러보았고 주인이 잠시 다른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 사이 나를 잡아끌었다.


간사님, 내가 이 문을 하나씩 열 테니까 다 찍으세요.”


그는 수조 반대편의 외진 곳에 자리한 서랍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그의 손동작에 맞춰 신중하게  카메라 포커스를 맞추던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서랍 안에는 형형색색의 뱀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가게의 한 쪽 벽이 모두 뱀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차라리 만식이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셔터를 눌렀다.


그 와중에도 선임은 나에게 뱀의 이름과 각각 CITES 몇 급인지 친절히 설명해주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 영혼은 이미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오르고 있었다.


현장조사를 마친 후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심각한 ‘종차별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동물은 보호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면서 다른 어떤 동물이 겪는 고통에는 무감각할 수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 받는 불합리한 처우에는 분노하면서 싫어하는 동물이 살아가는 열악한 환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치부할 수 있는 나의 알량한 권력이 계속해서 종차별적인 태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주 잠시였지만, 나는 분명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뱀의 사진을 찍으면서 ‘뱀 따위 내가 알게 뭐야.’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동물운동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물해방』의 저자 피터싱어(Peter Singer)는 그의 저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순히 한 개체가 어떤 종(種) 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그 존재를  차별하는 것은 일종의 편견이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인종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개인을 차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부도덕하고 정당화 될 수 없다.1)



싱어는 인간과 종(種)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물2)을 착취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인종에  따라 개인을 차별하는 것과 같이 부도덕하고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지어 ‘평등의 논리’를 인간에게만 적용하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했다.


나의 경우에는 동물의 이익도 인간과 같이 배려 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의하면서도 '내 마음이 가는 동물의 권리'와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옹호하는 또 다른 종차별을 저지르고 있었다.


내가 악어와 뱀을 좋아하지 않듯이 누군가는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인의 호불호가 어떤 종의 동물이 착취당하는 현실을 방관하고, 그를 고통 속에 방치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반려견에게 다른 동물의 모피를 입히거나 애완용 뱀에게 살아있는 햄스터를 먹이로 주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를 위해 다른 생명이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


우선은 "나는 동물을 사랑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부터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의 권리와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만식이와의 만남으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악어와 뱀을 좋아하지 않지만, 굳이 좋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이 아닌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없듯이 모든 동물을 사랑할 수 없다.


중요한건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개인의 호불호가 한 생명의 존재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1) 피터싱어. 2017. 『동물해방』 p409. 연암서가.

2)  그는 인간이 스스로 비인간동물(non-human animal)과 구분 짓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 자체가 편견 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동물’이라는 단어를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을 의 미하고자 할 때 사용하지만 이러한 용법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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