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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Aug 15. 2019

어리고 예쁜 동물을 사고싶은 마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나는 인터넷에서 개 한 마리를 샀다.      

25만 원이었다.    

  

간단했다.

 

신발이나 가방을 고르는 것처럼.

주말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것처럼.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강아지 분양]이라는 글자를 넣고 엔터키를 눌렀다. 그리고 맨 위에 노출된 사이트에 들어가 인형처럼 생긴 강아지들의 사진을 보며 원하는 아이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의 선택은 A플러스 등급의 강아지였다. A등급보다 5만 원이 더 비쌌다. 주문서를 작성하고 요청 사항을 적는 칸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예쁜 강아지로 부탁합니다.”          



며칠 뒤 판매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파보바이러스가 돌아서요. 보내려던 개가 죽었네요. 며칠 기다리셔야 돼요.”     


      

그의 말투는 흡사 ‘예상치 못 한 재료 소진으로 오늘 장사는 이만 접습니다.’라고 말하는 음식점 주인과도 같았다.


기운이 빠졌다. 


며칠이 더 흐른 뒤, 판매자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밝은 목소리였다.           


  

“파보가 안 뜬 녀석이 하나 있어요. 아주 예뻐요. A플러스 급이에요. 내일 저녁에 집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다음 날, 낯선 세상에 몸을 벌벌 떠는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회색 봉고차에 실려 우리 집에 도착했다.


한 손으로 안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귀여운 시츄였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포로리’라고 지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귀여운 다람쥐의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의 포로리




그로부터 9년 뒤,

나는 동물보호 시민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맡은 업무는 동물보호정책이나 사업에 필요한 자료를 리서치하고 캠페인을 기획하는 이었다.


오랜 시간 공부를 하며 느낀 바로는 이론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현장은 이 없고, 현장을 알지 못하는 이론은 공허하다. 다시 말해, 책상 앞에 앉아 제대로 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 현장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활동가들은 단체에서 운영하는 보호소에서 며칠간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보호소에 출근하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한 방에 6-7마리씩 있는 동물들배설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개들이 생활하는 방의 경우 밤새 널브러진 변을 신문지로 주워 담고, 말라서 굳어버린 오줌 자국 위에 물을 희석한 소독제를 뿌린다. 그 후 바닥의 먼지를 쓸어내고 물기 있는 밀대로 닦아야 한다.


고양이들이 생활하는 방은 평균 2-3개씩 놓인 냐옹이 화장실을 밖으로 꺼내서 자그마한 삽으로 응가를 퍼낸다. 그리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고냥이들의 방석과 담요 위에 쌓인 털을 쓸어 담고 한 번씩 털어낸다.


청소를 모두 끝내고 나면, 정량의 사료가 담긴 그릇을 준비한다. 아픈 동물들의 밥에는 수의사가 지어준 약도 함께 넣어준다.


이때, 먹성이 있는 개가 다른 친구의 사료를 탐하지 않도록 유심히 지켜보는 것이 핵심이다.


여러 마리가 함께 모여 사는 곳에서, 모두에게 공평한 식사시간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보호소의 식사시간





내가 관리하는 방에는 유난히 소심한 개들이 몇 마리 있었다.


보호소에는 대부분 '만져주세요, 우리 놀아요!!' 하며 달려드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나는 혼자 멀뚱히 떨어져 지내는 동물들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누군가와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우리 포로리처럼 말이다.


동물들의 전투적인 아침 식사가 끝나면 방에 놓인 물그릇에 새 물을 받아준다. 그렇게 오전 업무는 끝.


매일 아침 최소의 인원으로 약 300마리의 동물들을 한꺼번에 돌봐야 하기 때문에 보호소에서 근무하는 활동가들은 허리 한 번 펴지 못할 때가 많다.


당시 나는 육체적으로 강도 높은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또 많은 동물들을 돌볼 수 있는 요령도 없었다. 업무를 시작하고 두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크서클이 얼굴을 뒤덮었고, 수백 마리의 개와 고양이 사이에서 '어디에든 눕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격렬하게 휘젓고 다녔다. 고작 며칠 근무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근육통이 생겨 파스를 붙이기도 했다.  


나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점심시간이 지후에는 어김없이 개들의 산책 시간이 돌아온다. 해가 밝게 비추는 시간 동안 옥상이나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때, 동물들의 외부활동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활동가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동물들을 목욕시켰다. 피부병이 있는 아이들은 약용샴푸로 마사지한 후 정성껏 씻겨주고, 커다란 드라이어 밑에서 털을 보송하게 말린다. 그렇게 한 사람당 몇 마리의 개를 목욕시켜주고 나면 어느새 저녁밥을 배식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정신없이 하루의 일과가 끝나가고 있었다.


땀과 동물 냄새가 잔뜩 밴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고 집에 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곳에 있는 동물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자세히 보였다.



“입양은 잘 가는 편인가요?”     



바쁘게 돌아가는 낮 시간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질문을 선임에게 건넸다.



작고 어린애들 그리고 품종이 있는 애들은 들어오자마자 입양도 잘 가는데, 오래 있는 애들은 여기에 계속 있어요.



내가 몸 담고 있던 단체는 입양을 가지 못 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안락사를 시키지 않는 정책으로 보호소를 운영했다. 그래서 어릴 때 들어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는 동물들도 더러는 있었다. 보호소 한 켠에는 그곳에서 눈을 감은 아이들을 추억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유난히 얌전했던, 그래서 다른 개에게 밥을 자꾸 빼앗기던 녀석을 가리키며 나는 다시 물었다.



"쟤는 너무 얌전한데 왜 입양을 못 가는 걸까요?"


"소심하면 또 싫어해요. 사람들은 애교가 많은 개를 더 선호하죠."



동물도 그랬다.

작고, 어리고, 예쁘고, 밝은 성격이 아니면 좀처럼 선택받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인터넷에서 개를 사겠다고 알아보았을 때에도 같은 마음이었다.


손바닥 안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작았으면.

인형처럼 예쁘고 귀여웠으면.

내 말을 잘 들었으면.


돈으로 생명을 구입하려고 했을 때, 살아있는 동물은 이미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유행의 시대>를 통해 "현대사회의 소비지향적인 경제는 과잉공급 그리고 공급된 것들이 빠르게 노화해 결국 매력을 잃는다는 점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시장경제는 매일 넘치도록 쏟아져 나오는 상품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값을 지불하며 소유하는 메커니즘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구입한 상품은 매력을 잃음과 동시에 쉽게 버릴 수 있으며 언제든 값을 지불할 능력만 있다면 마음에 드는 것으로 새로 살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논리가 '생명을 사고파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나의 '취향이 변했다', '매력이 사라졌다.'는 하찮은 이유만으로 바자회에 내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말이다.





살아있는 생명을 사는 일




우리 법에는 2개월령 미만의 동물을 판매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있지만, 겨우 눈을 뜨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아기 동물들이 유리창에 전시되어 있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펫샵을 찾아내는 일이 오히려 어려울 정도이다. 동물이 태어난 날짜를 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바꿔서 적어놓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소비자들이 더 작고, 더 귀엽고, 더 어린 동물을 원할수록 판매자는 가급적 돈이 되는 물건을 들여와 팔고 싶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은, 심미적 기능을 상실하여 '돈이 되지 않는 물건'으로 전락한 동물들이 유통기한 다 된 식품이나 유행 지난 물건이 할인가에 판매되다가 처분되는 것처럼 안락사되거나 다시 농장으로 보내져 출산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이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더니 그 말이 딱이네. 어떻게 사람보다 동물이 더 대우받아?"



그동안 내가 동물과 관련한 일을 해오며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이다.


정말 그럴까.


이사를 간다는 이유로, 결혼을 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기로 했다는 이유로, 동물이 아프다는 이유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버리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말이다.


애초에 돈을 주고 사는 동물을 사람들이, 그저 한 명의 정당한 소비자의 위치에 자리할 수 있는 사회에서 도대체 어떠한 동물보호정책이 실효성 있게 시행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포로리는 어느새 13살이 되었다.


까맣던 눈동자는 하얀색으로 변했고, 좋아하던 간식을 앞에 두어도 잘 찾지 못한다. 진갈색 윤기가 흐르던 털은 색이 모두 빠지고 결은 푸석푸석해졌으며,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내가 이름을 불러도 바로바로 반응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포로리가 좋아진다.


다른 사람들 눈에 예쁘지 않아도 좋으니, 인형 같지 않아도 좋으니, 밥투정을 해도 좋으니, 가능한 아프지 말고 오래도록 함께였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알고있는 사랑은 그런 성질의 것이다.


가장 예쁘고 반짝이는 순간에도.

가장 어둡고 힘없고 초라한 순간에도 곁에 있어주는 것. 함께하는 것. 끌어안아 주는 것.


그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말이다.





참고문헌


지그문트바우만(Zygmunt Bauman), 2013. 『유행의시대』, 오월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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