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그리던 월출산에 올랐다. 겹친 일정으로 잠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당일 산행으로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피곤한 일정이라도 버스 타는 시간에 잠을 보충할 수 있어서 총총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월출산 원경
네 시간 반 정도 가는 먼 길로 읽을 책 두 권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산행은 은행퇴직동우회 행사로 관광버스 한 대에 맞춘 인원인 마흔이 좀 넘게 참여했다.
동우회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선배님들의 체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월출산은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바위산이고 경사가 심해 오르기 만만치 않은 산인데 70이 넘은 분들이 많이 참여해서 거뜬하게 산을 올랐기 때문이다. 평소에 지속적인 자기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월출산은 평야가 펼쳐진 끝자락에 불쑥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신기한 산이다. 주봉인 천황봉이 809미터로 높지는 않아도 기암 봉우리들이 뾰족하게 솟아 있어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월출산은 오래전부터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산으로 여겨져서, 신라 시절부터 국가에서 제사를 지낸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사가 심해 등산하기에 난도가 높은 산으로 꼽힌다. 월출산 이름은 가장 달이 빨리 뜬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산 아래 11시 반에 도착하여 점심으로 짱뚱어 탕을 먹었다. 전라도의 맛깔난 밑반찬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밥을 더 시켜 먹었다. 촉박한 일정으로 식사가 끝난 직후 바로 산행에 돌입했다.
탐방로 입구
평일인 관계로 등산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등산 일정은 천황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하여 구름다리를 거쳐 천황봉에 오르고 경포대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4시간 반 정도 걸리는 코스였다.
등산로에 들어서자마자 돌길을 걸었다. 산은 한반도 남단 끝자락에 위치해 식생이 난대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숲이 서울 근교 산과는 많이 다른 모양새다. 빽빽하게 우거진 숲에 두터운 잎사귀들이 반짝이는 동백나무가 많이 보였다. 하늘에 구름이 어려 따가운 햇살이 없었지만 내리쬐더라도 다행히 숲이 터널을 이뤄 그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한참 동안은 이대가 밀식하여 자라는 곳이 길게 이어졌다.
구 월 중순인데도 날씨는 무더웠다. 오를수록 경사가 가팔라 땀이 송송 솟아났다. 이온 음료 한 병과 생수 한 병을 준비해서 간간이 마시며 올라갔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자마자 곧바로 산행을 해서 힘이 더 드는 것 같다.
회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지런히 산을 오른다. 온통 바위 길로 맨 땅은 거의 밟을 수가 없다. 가팔라진 호흡에 힘이 들지만 숲이 뿜어내는 맑은 산소와 피톤치드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시간에 숲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힘을 낸다.
코로 들숨을 쉬고 입으로 날숨을 내쉬고 싶지만 너무 헉헉대다 보니 입으로만 호흡을 할 수밖에 없다.
허벅지도 힘겨워 터질 듯하다. 그간 게을렀던 스쾃 운동을 며칠 전부터 시작한 후유증으로 근육통이 약간 있었는데 고된 산행이 오히려 근육통을 푸는 시간이 되어 고통을 즐기며 걷는다.
숲터널을 지나 시야가 트인 공간을 만난다. 발아래에는 반듯하게 정돈된 논이 싱그러운 녹색으로 단장한 풍경이 보이고 위로는 커다란 암벽이 보인다. 그간 숨겨놓은 월출산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는 순간이다.기기묘묘한 바위와 주름진 암벽 그리고 푸른 숲이 특별한 경치를 보인다.
이윽고 월출산의 빼어난 절경 중 하나인 구름다리에 오른다. 구름다리는 시루봉과 매봉을 연결하는 현수교로 길이 54m, 너비 1m로 해발 510m, 지상 120m 높이의 아찔한 허공에 설치된 다리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아래를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후들거리며 다리를 건너야 했다. 아래가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 나로서는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다리를 건너 전망대에서 둘러보는 풍경이 압권이다. 포개진 암벽 사이로 나무들이 자라나고 우뚝 솟은 기암 봉우리들을 감싸고 있는 푸른 소나무 숲이 절경을 빚어낸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산 아래에서 기분 좋게 부는 바람이 땀에 절은 몸을 어루만진다.
천황봉이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가야 할 길은 멀다. 구름다리를 지나 오르는 길은 거의 수직으로 보이는 철제 계단이다. 누군가의 수고로 놓은 구조물이 있어 월출산은 쉬 오를 수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이전에는 아마도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험한 산이 분명한 것 같다. 오를수록 산의 빼어난 자태가 보인다. 눈앞의 풍경은 즐거움이지만 급경사계단을 올라야 하는 수고가 발목을 잡는다.
이제 다 올랐나 싶으면 또 내리막이다. 삶의 굴곡을 복습하듯 오르락 내리락의 반복이다. 힘든 길을 오르는 만큼 산은 공평하게 숨은 비경을 보여준다. 걷는 일이 힘들어지고 죽을 만큼 힘들다는 푸념에 신기하게도 평탄한 길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다시 힘을 내서 고지를 향해 걷는다.
통천문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이제는 다 왔다는 기쁨에 문을 들어서지만 안타깝게도 다시 내리막이다.
통천문
마침내 돌고 돌아 천황봉에 올랐다. 성취의 순간은 기쁨이다. 만면에 미소가 피어오르고 몸도 가벼워진다.
저마다 인증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그 대열에 나도 동참하여 멋진 포즈를 취한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본다.넉넉한 산의 품이 푸근하다.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가야 하는 법, 자연스럽게 하산을 향해 나간다. 성취의 기쁨이 지나 조금은 힘겹지만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산의 모습에 힘을 낸다. 가다 만난 남근석이 너무도 노골적이다.
내리막 길도 반드시 내리막만 있지 않다. 오르는 길이 반드시 나온다. 다시 겸손을 배운다. 근육은 힘이 들고 온통 땀에 절은 몸은 자꾸만 늘어진다. 가져온 이온 음료와 물은 바닥이 났다.
감사하게도 물이 흐르는 계곡을 만났다. 무조건 물에 직진이다. 수량이 많지 않아 물을 끼얹는 수준이지만 그 청량한 냉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함께 한 후배는 계곡물을 거침없이 들이킨다. 청정 1 급수의 물맛이 그만이란다. 그렇게 새 힘을 얻고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
이어지는 닭갈비와 닭백숙이 든든한 저녁이 되고 싸우나로 개운하게 귀경길에 오른다. 늘 마음에 있었던 오르고 싶은 산을 올라 기쁘다. 아울러 산행을 무난히 마쳐즐겁다. 멋진 하루가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