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맑은 가을날 운악산에 올랐다. 다소 쌀쌀한 아침의 느낌이 산 초입에 들어서니 청량감으로 바뀐다.운악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망경대를 중심으로 높이 솟구친 암봉들이 구름을 뚫을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산 이름이 갖는 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산행 내내 펼쳐졌다.
운악산은 높이가 975미터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경사가 급하여 오르기가 쉽지 않다. 산봉우리가 기암으로 형성되어 경기의 금강으로도 불린다. 흔히 악자가 들어간 산은 산행이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라보니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절감한다. 결코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니었다.
산행은 오전 7시에 서울 잠실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것으로 시작했다. 시월에 들어서서 분주한 일정이 겹쳐 새벽같이 나서려니 꽤 피곤했다.
운악산은 가평과 포천 사이에 위치한 산으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전 8시 30분부터 산을 올랐다. 운악산에는 현등사라는 고찰이 있어서 현등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화려한 단청으로 단장한 일주문이 손을 활짝 벌려 우리를 반긴다. 아침이 주는 신선한 분위기가 가벼운 흥분을 가져온다. 아직은 푸른 잎들이 우거진 숲이 선사하는 기운이 상쾌하다. 신록은 여전하지만 차분하게 정돈된 풍경이 천천히 여름을 정리하고 새로운 계절을 맞는 숲의 변화로 느껴진다.
꽃을 이미 피워버린 풀꽃들은 한 해의 결실을 맺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데, 반갑게도 한창 꽃을 피운 아이들도 있다. 물봉선이 입구에 얼굴을 내밀고 철없는 진달래도 계절을 잊고 꽃망울을 피웠다.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꽃은 산부추다. 가녀린 잎 사이로 꽃대를 내밀고 앙증맞은 보라색 꽃송이가 우산처럼 당차게 피었다. 입구부터 산마루까지 심심하다 싶으면 까꿍 하듯이 눈이 마주쳐지친 발걸음을 격려해 준다.
진달래
산부추
얼마 오르지 않은 곳에 출렁다리가 있다. 210미터의 꽤 긴 다리인데 구태여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지 조금 의아하다. 지자체마다 앞다투어 설치하는 붐이 불어서가 아닐까 싶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가장 자연스럽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출렁다리
인근에 호명 호수가 있어서인지 운악산 주위에는 구름이 그치질 않는다. 얼마간 오르다 아래를 굽어보면 멀리 구름바다가 보인다. 오를수록 산봉우리에 걸친 운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위로 올려 보면 기암들이 제 모습을 조금씩 보여준다. 아직은 단풍이 익지 않았는지 조금씩 흩뿌려 놓은 듯 붉은빛이 푸른 나무 사이마다 숨어있다. 옅은 화장으로 자연스러운 미를 머금은 청아한 여인의 얼굴이다.
헉헉거리며 산을 올라 하늘에 가까이 갈수록 기암의 위용이 드러난다. 가로로 그어놓은 듯한 돌출된 암벽들이 물결치듯 이어져 있고 장식처럼 소나무가 군데군데 자라나서 묵으로 그린 고서화의 아취가 풍긴다.
점점 더 경사가 심해지고 암벽등반 하는 것처럼 설치된 줄을 붙잡고 오른다. 정상에 다 오른 것 같은데 또다시 올라야 한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조금씩 힘겹던 허벅지의 통증도 아예 무뎌지는 느낌이다. 등산은 힘든 운동이다. 시간이 갈수록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도 아프다. 땀도 덩달아 비 오듯 쏟아진다. 이렇게 힘든 일을 자처해서 하는 것도 한 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산을 오를수록 자연은 고이 접어 숨겨 놓은 고운 속살을 조금씩 드러낸다. 가까이 가서 만나는 병풍바위의 신비로운 자태가 감탄을 부른다. 경기의 금강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금강산 만물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부분을 옮겨다 놓은 듯 기암들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병풍바위
미륵암
높은 곳에 올라 발아래 구름을 두니 세상 부러운 것 하나도 없는 것 같은 호기도 차오른다. 운해가 산 봉우리를 감싸 남해의 바닷가 풍경을 연출한다. 눈앞에는 바위가 빚어내는 경치가 저 멀리에는 구름이 그려내는 풍경이 한동안 눈길을 사로잡는다.
정상에 올랐지만 이곳보다 오르면서 만났던 풍광이 훨씬 더 좋다. 산마루에는 단풍이 제법 물들었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가을로 옷을 갈아입게 되면 아주 매혹적인 풍경일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
반대편 길로 하산을 하면서 현등사에도 들렀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된 절이라고 하지만 1829년에 전소하여 중건과 개축이 이루어져 오래된 느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소나무와 가람의 화려한 단청과 단풍이 어우러진 정경은 눈이 부셨다. 가람 입구에 붉은 자줏빛을 머금고 개화한 꽃향유가 방문객을 반겼다.
꽃향유
현등사
4시간 반 동안 산길을 걷다 하산을 했다. 내려오는 길이 더 경사가 심하고 암석이 깔린 길이어서 힘이 더 들었고 미끄럽기까지 해서 위험하기도 했다. 쉽지 않은 산행이었지만 청명한 가을날, 운악산의 매력을 제대로 맛보고 느낄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하산하면서 크고 작은 산목련을 많이 만났다. 함박꽃 피는 5-6월에 오면 제대로 꽃을 감상할 수 있는 산이다. 봄날이 오면 다시 한번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