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숲 Apr 17. 2023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2)

<2023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 선정작-박숲>



     나는 재빨리 숨을 고른 뒤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까치 까치 설날은, 그 노래 아시죠? 설날은 지났지만 우리 그 노래 같이 불러 볼까요? 기억을 끄집어내고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은 노래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다. 그러나 노인들이 기억할 수 있는 노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가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유리코는 다른 기억들이 모두 빠져나가도 노래나 음악에 대한 기억만큼은 생의 불씨처럼 놓지 않는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과 붙잡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의 역할은 노인들이 각자의 기억을 좀 더 지연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 그들의 인지력을 자극해야 했다.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이고 생일이 언제인지, 내가 살던 집은 어디이고 자식은 몇 명인지, 자식들의 성별은 무엇이고 나이는 각각 몇 살이며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런 인지 정보는 가장 기본적인 기억이었다. 그마저도 사라지면 노인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불완전한, 너무도 아슬아슬한 존재들. 노인들의 기억은 점점 투명해지고 얇아지고 희박해져 갔다. 

    노인들 곁을 지나며 잘못 끼워진 끈을 빼내고 다시 끼우라고 했다. 노인들은 손이 떨려 자꾸만 구멍에 끈을 뒤집어서 끼우거나 엉키게 끼웠다. 어떤 행위 앞에서 이곳 노인들은 자주 어린아이가 되었다. 어머니, 끈을 처음부터 제대로 끼우셔야죠. 안 그러면 다 풀어내고 다시 끼워야 돼요. 끝에 앉은 김 노인이 대꾸를 했다. 그려, 뭐든 첨부텀 잘 끼워야지 안 그럼 실패하는겨. 맞은편 심 할머니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여? 선생님이 대신해 주면 안 될까? 아이고 난 못 하겠어. 활동 시간마다 스스로 하기보다 유난히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한 할머니였다. 육 개월째 활동에 진전이 없었다. 소근육 발달을 위해 손가락을 많이 움직여야 하니 스스로 해결하라고 다독여 보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수업 내내 불평을 하며 징징대거나 아이처럼 조르며 나를 옆에 잡아 두곤 했다. 

    아이구, 거 자꾸 혼자 해 볼라고 해야지. 누가 대신해 주면 그게 뭔 소용이여. 끼어들기 좋아하고 바른 소리를 잘하는 정희 할머니가 심 할머니를 나무랐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왜 남의 일에 신경 쓰냐고 되받아칠 만도 한데 심 할머니는 그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심 할머니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른 뒤 손을 잡고 부직포 주머니의 구멍에 마 끈을 함께 끼워 넣었다. 활동 시간 내내 나를 붙잡아 두려는 심 할머니의 속셈을 모른 척했다. 자신의 존재가 잊힌다는 것은 곧 사라짐을 인정하게 되는 의미일 테니까. 

    조 군, 잘 돼 가요? 조 군은 끈을 구멍 하나에 끼웠다 뺐다 하며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조 군, 이 선물 주머니 만들어서 누구 줄 거예요? 조 군은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노인들은 꼭 웃어야 할 때 웃는 게 아니라 아무 때나 잘 웃었다. 그런 건 아이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알아 버린 듯한 노인들의 웃음은 아이들의 웃음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의 웃음에는 다 읽지 못한 책을 어쩔 수 없이 덮어야 할 때처럼 묘한 여운을 남기거나 처연한 구석이 있었다. 기억을 많이 소실한 노인들은 웃지 않을 일에도 자주 웃었다. 그러나 유리코는 잘 웃지 않았다. 잘 웃지 않는 노인은 어떤 슬픔을 안고 있기 때문일까. 노인의 적막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몰랐던 걸까. 나는 유리코가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유리코에게 더 끌렸을지 모른다. 잘 웃는 다른 노인들의 명랑은 내가 굳이 돌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내 앞에서 한 번도 웃지 않던 할머니. 할머니와 유리코는 왜 웃지 않는 노인이 되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