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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빈 Feb 10. 2021

가을 밤에 든 생각

답답할 때면 동네에 흐르는 작은 천을 따라 걷는다. 갈대밭에 다다르니 차갑지만 따뜻한, 어쩐지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냄새가 난다. 이 냄새는 가을이 왔다는 걸 알려주는 신호다. 이럴 때면 눈을 감아도 그려지는 어떤 잔상이 있다. 나에게 처음 계절 냄새를 알려준 할아버지의 잔상.


“가을에는 시원한 장작 냄새가 나는 것처럼, 봄에는 달큰한 흙 냄새, 여름에는 비릿한 물 냄새, 겨울은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나는 거여.”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숨을 훅 들이쉬면 폐에 꽉 차는 바람결의 냄새를 맡는다. 갑자기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선 채 눈을 감는다.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린다. 두터운 꽃무늬 이불에선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 끼익하고 문이 열린다. 살며시 문을 열던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다. 

“강아지 깼나.”

그럼 나는 벌떡 일어나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간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앞마당엔 나의 친척들이 가득하다. 괄괄한 성격의 큰고모부터 장가 못 간 순박한 우리 작은 삼촌, 매번 인형을 가져다 주시는 인형 공장 숙모까지. 할아버지는 작은 나를 들어 올린 후 가장 편안한 의자에 앉혀 놓는다. 엄마가 뜨거운 군고구마를 후후 불어준다. 잠을 실컷 자느라 배가 고팠던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가만히 기다린다.


눈을 감는다. 나는 할아버지의 낡은 초록색 등산복을 꼭 잡고 있다. 여름 산들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리다 잔뜩 벌린 입속으로 들어간다. 방앗간 옆 떡집 앞에서 오토바이는 멈춘다. 주인 아주머니가 갓 나온 가래떡을 조금 잘라 내 입에 넣어 주신다. 고소하고 찐득한 맛이 맴돌아 입맛을 다신다. 손가락을 빠는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허허 웃는다.


냇가에선 삼촌과 사촌오빠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다. 피라미가 들어있는 손을 살짝 열어 나에게 보여준다. 나도 바지를 걷고는 물에 들어간다. 청바지가 검은 색이 되도록 소라고둥을 잡아 페트병에 넣는다. 고개를 들면 시원한 바람이 분다. 촉촉한 땀이 말라가는 기분이 좋다.


노을이 질 때면 할아버지의 보리밭이 주황빛이 된다. 나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나온 황금빛 땅 엘도라도를 생각하며 눈을 꿈뻑인다. 멍한 나를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내 손에 힘을 주더니 “강아지, 할머니가 맛난 거 해놨다는데 들어갈까”라고 묻는다.


다시 눈을 떴다 감는다. 사진 속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7살의 나는 죽음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라 헤헤 웃으며 사촌들과 장례식장을 뛰어다닌다. 검정 옷의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술래잡기를 한다. 우는 아빠가 낯설어 다가가 아빠 왜 우냐고 물어봐도 말이 없다. 더는 할아버지 손을 잡을 수도, 오토바이 뒤에 탈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나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젓가락으로 장난치며 콩자반을 튕겨낸다. 평소 같으면 내 옆에 앉아 콩 집는 걸 도와줄텐데 이상하게 할아버지는 오지 않는다.


어른들은 울고 아이들은 속도 없이 웃던 가을밤, 그렇게 할아버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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