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면 우리가 떠올리는 의미는 원래 힘들거나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을 뜻하는 영어단어 work에 예술작품이라는 뜻도 담겨 있듯이 원래 일이란 지금 우리가 회사에서 월급 받고 하는 행위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기에 다소 변질됐다고 할 수 있다. 실은 우리가 회사에서 하는 행위를 정확하게 지칭하는 단어는 바로 ‘노동(勞動)’이다.
노동이란 한자를 풀이해보면 수고로울 로(勞), 움직일 동(動), 즉 힘들게 움직이는 일이란 뜻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여러 언어에서도 노동의 의미가 이런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을 지칭하는 영어는 labour다. 14세기 영어에 처음 등장했다는 이 단어는 힘든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노동을 뜻하는 독일어 arbeiten도 ‘억지로 하는 힘든 일’이라는 의미가 있다. 심지어 노동하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travailler은 고문도구라는 뜻의 라틴어 tripalium에서 나온 말이다(한경애,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그린비, 2007).
우아하게 예술활동까지 포괄하던 ‘일’은 어쩌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노동이라는 단어로 대체가 된 것일까?
노동이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결과물로 자본가가 등장하며 파생된 것이다. 경작지를 목초지로 바꿔서 양을 키우면 양털과 양고기를 팔아서 밀을 경작할 때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데 눈을 뜬 봉건영주나 지주들이 늘어난 결과였다. 생산된 양털은 모직물 산업 활황으로 이어졌으며 양떼 목장에 밀려난 농부들은 결국 모직물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로 재탄생하게 된다.
자본가에게 고용돼 제공하게 되는 노동은 우리 조상들이 자연스럽게 하던 일과 뭐가 다른 것일까. 여러 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는 경작을 한다거나 사냥, 물고기 잡기 같은 생계를 위한 활동은 하루에 3~4시간에 불과하다고 한다. 호주 아넘랜드 원주민들은 실제로 하루에 일하는 시간이 서너 시간뿐이라 한다. 중세시대에도 많이 놀았다는 연구결과가 즐비하다. 프랑스의 노동사회학자 보방에 의하면 1700년경에만 해도 평민들이 일하는 날은 1년에 180일 정도였단다. 1년이 365일이니, 업무일이 절반 밖에 안됐다는 얘기다. 온갖 축제와 종교행사, 개인적인 파티들이 툭하면 열려서 놀 일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완전히 바뀌어 버리고 만다. 고용된 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일해야 했다. 자본주의는 정해진 자원과 시설을 활용해 최대한의 제품을 생산해 수익을 올리는 구조이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이려면 고용한 노동자들을 최대한 굴리는 쪽으로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노동자들은 그저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도구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EBS에서 하는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직종의 일터를 찾아가 그 직업의 맨얼굴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기계 속도에 맞추느라 녹초가 되는 사람들이 종종 나오는데 나는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묘한 느낌을 받는다. 기계 앞에서 일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빠른 기계 속도에 맞추느라 정신없이 손발을 놀리며 일한다. 일 자체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반복된 노동의 결과로 숙련된 동작의 달인이 탄생한다. 그곳에서 인간 노동자는 부품의 하나가 되고 만다.
오늘날의 노동이란 노동의 대가를 받기 위해 한 인간이 자신의 유한한 시간과 체력을 제공하는 행위다.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시간과 체력을 가져가는 대가로 월급을 주는 것이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는 양떼 목장 때문에 농민들이 밀려난 것을 두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었다”고 한탄했지만, 작금의 현실을 보면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노동이 일의 즐거움을 잡아먹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