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랑살랑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날에 떨리는 내 마음처럼 나무에 잎들도 이리저리 춤을 추는 초여름에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 도착해서 긴장의 땀으로 젖은 초록색 여권으로 입국심사를 했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나를 데리러 온 그 아이와 만났다. 부드러운 카푸치노처럼 갈색의 머리카락과 토마토의 붉은색처럼 발그레한 볼이 터질듯한 웃음이 내 눈앞에 살아있었다. 깜빡이는 속눈썹의 움직임과 말을 하면서 올라가는 입꼬리는 보고 또 봐도 신기했다. 매일 주고받던 문자에서 느껴지던 글자가 주는 차분함과 섬세함은 실제 말과 목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신호등의 빨간불을 봐도 웃음이 나고 길을 걷는 강아지를 봐도 웃음이 났다. 눈을 마주치면 미소가 지어지고 온 세상에 신비로운 실로폰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법이 펼쳐지는 동화 속에 살아있는 기분이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말을 하지 않고 눈빛을 보기만 해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 수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내리쬐는 햇볕의 따스함을 같이 느끼고 새의 지저귀는 짹짹 소리를 같이 들었다. 모든 소리와 공기를 같이 느끼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사랑이었다.
늦가을에 또 모스크바로 갔다. 이번 만남이 끝나면 언제 볼지 모르는 기약 없음을 알고 우리가 바라보는 호수는 헤어짐을 앞두고 흘리는 아쉬움의 눈물이 모인 것 같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바람에 구르는 모습이 좋아한다고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발을 동동 구르는 나의 발 같았다. 몇 시간의 대화 끝에 그 사람의 나를 향한 감정은 사랑보다 우정이었음을 알게 됐다. 반짝거리는 화려한 조명 아래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 앞에서 헤어짐의 포옹을 하고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그 사람은 떠났다. 그에게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가 우정이라 보낸 감정은 나에게 다가와 사랑으로 다가왔다. 사랑은 희미한 목소리의 여운만 남기고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