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를 고르는 기준?

초이스맘의 선택

by 싱싱맘

처음 정자은행 사이트를 들어갔을 때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기증자 프로필을 보고,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까지 할 수 있다니... 인종, 머리색, 눈동자 색, 키, 혈액형, 몸무게, 학력 등을 필터링할 수 있는 화면은 마치 데이팅앱과도 비슷했다. 심지어 어릴 적 사진까지...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묘한 불편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정자 선택은 데이팅 앱처럼 “만나보고 아니면 말지”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결정은 한 인간의 탄생과 직결되고, 그 아이의 평생의 출발점이 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많은 고민이 되었다.


덴마크 정자은행 방문기


정자은행은 전 세계에 있지만, 내가 직접 방문한 곳은 덴마크였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인공수정 관련 규제가 진보적인 나라 중의 하나이다. 법적으로 투명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선택의 폭이 넓어, 유럽 내에서도 신뢰도와 인기가 높다. 기증자 정보 관리와 기증자-자녀의 권리 범위까지 체계적으로 설계한 몇 안 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1997년 제정된 보조생식법(Act on Artificial Fertilisation)을 통해 정자와 난자 기증 및 난임치료의 법적 의료적 기준을 마련하고, 정자·난자·배아의 사용 및 연구에 관한 윤리적·의료적 규제를 시작하였다. 2006년 법 개정을 통해 미혼여성 및 동성 커플에게도 보조생식술의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한 기증자에 의해 태어날 수 있는 자녀 수를 제한하는 등의 규제도 도입하였는데, 기증자 1명당 덴마크 내 최대 12 가족까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난자 또는 배아의 보관이 최대 5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2018년에는 태아가 부모 중 적어도 한 사람과 유전적으로 연결돼 있어야 한다는 법 조항을 없애 기증난자와 기증정자를 조합해 임신을 할 수 있는 '이중 기증'까지 허용했다. 이를 통해 동성 커플 혹은 난자가 건강하지 않은 비혼 여성도 인공수정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찾은 정자은행은 전형적인 북유럽풍 건물의 2층에 있었다. 외관은 오래되고 고풍스러웠지만,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차분했다. 금요일 아침이어서인지 로비는 한산했고, 상담 직원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시아에서 직접 찾아온 고객은 처음이라며, 그녀는 내 사연을 궁금해했다.


나는 간단히 설명했다. “난자는 한국에 냉동보관 중이고, 미혼입니다. 정자기증을 통해 아이를 출산하는 방법을 알아보러 왔어요.”


상담 직원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고민을 듣는 것처럼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녀는 정자은행의 상담이 대부분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를 설명했다. 기증자와 고객 모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내가 방문한 날은 금요일이라 기증자가 아무도 없었지만, 평소에는 “Male Production Room”이라 불리는 방에서 정자가 수집되고, 이렇게 수집된 정자는 전 세계 난임클리닉으로 배송된다고 한다.


정자 선택, 생각보다 훨씬 ‘정성적인 작업’


상담 직원은 “기증받을 생각이라면, 프로필을 정말 꼼꼼히 읽어보라”라고 했다.


정자은행이 관리하는 기증자의 프로필은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여러 번 읽다 보면 기증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친숙한 느낌이 일견 들다가도, 실명도 모르고 직접 연락할 수도 없어서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유전·의료 정보(키·체형, 알러지, 시력, 혈액형, 가족 병력 등)

어린 시절 사진 (국가마다 공개 여부에 대한 규제가 다른 점 주의. 예를 들어, 영국인 기증자들의 경우 사진 비공개)

음주·흡연·운동 횟수·생활습관

최종학력·전공·직업

심리검사 결과

정자은행 담당자가 진행한 기증자 인터뷰

기증자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음성 파일

기증자가 직접 쓴 자필 편지 (Why did you donate?)

성인이 된 후 사진 공개 여부는 정자은행마다 정책이 다름


스펙만 보고 쉽게 결정하지 말고, 최소한의 실사를 반드시 해야 한다. 반복적 음주, 가족의 특정 유전 질환, 흡연 여부, 약물 이력 등도 나와있기 때문에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비슷비슷한 프로필을 무심히 들여다보다가, 인상 깊은 기증자들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누나가 정자 기증으로 아이를 가졌어요. 조카가 사랑스럽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이를 낳을 계획은 없지만, 난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의미 있다고 느낍니다.”


그들의 사연을 읽으며, 나는 숫자와 유전자 너머의 ‘사람’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상담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제도와 개념들도 있었다.


Exclusivity: 더 많은 비용을 내면, 특정 기증자가 제공하는 정자에 대해 독점권을 가질 수 있음

ID Release: (기증자가 동의한 경우에 한하여) 아이가 성년이 된 후 원할 경우 기증자에게 연락할 권리를 갖는 옵션

기증자는 생물학적 부이지만 하지만, 아무런 법적 권리도 책임도 없음


유럽에서 느낀 위로, 한국에서 느낀 불안


한국에서는 “혼자 아이를 낳는 여성”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 나이, 배우자, 가족 형태에 대한 시선도 매우 보수적이다. 심지어 늦은 나이의 노산이니 더 기겁할 노릇이다. 하지만 덴마크의 상담직원은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요즘 이런 케이스 많아요. 너무 자연스러운 선택이에요.”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위로가 됐다.




정자를 고르는 기준이 있을까?


있다, 하지만 그건 숫자나 조건표 위에 있지 않다.


건강, 유전자, 외모, 학력보다 중요한 건 ‘이 아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내 마음이다.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 나와 우리 가족을 쏙 빼닮은 눈·코·입, 우리 집안의 표정과 웃음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다들 아이가 자기를 닮았다고 우기면서 옛날옛적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나오고 한참 동안 이야기꽃이 핀다.


앞으로 기쁨과 슬픔, 도전과 위로를 함께 나누며 알콩달콩 살아갈 나의 가족이라는 것만 보였다.


PS: 스페인의 경우 여성이 직접 기증자를 선택할 수 없고, 난임센터 의료진이 기증자를 매칭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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