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 중 문득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돈이 없어 궁핍하게 지낸 부부가 서로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장만하기 위해 아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시계줄을, 남편은 자신의 시계를 팔아 머리빗을 장만한다. 결국 크리스마스 당일날 서로가 서로의 진심을 알고, 기껏 준비한 선물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어째선지 이 이야기를 다시금 상기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더 이상 이런 사랑을 꿈꾸기가 힘든 현실의 이면들을 너무나 많이 봐온 탓일까, 아니면 오로지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랑이라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한 탓일까. 어느 쪽이든 이 눈물에는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다. 사랑만으로 모든 것들을 이겨내기엔 변수가 너무 많은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두 사람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갖고 싶다는 부러움. 사실 그 외에도 또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의식적으로 깨달은 연유는 여기까지가 명확하다. 또한 더 생각해봤자 눈물이 더 짙어질 뿐이다. 각설하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때 그 느낌을 박형서 작가의 단편 '자정의 픽션'을 읽고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주인공 나는 학원에서 아이들과 밀당하며 입씨름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그가 업무를 열두 시간 동안 끝마치면 그의 여자친구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돌아온다. 그녀 역시 마트에서 온종일 서 있는 업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수제비를 만드려고 국물을 내기 위해 멸치를 찾고 있었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마트에서는 수백만 마리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멸치이건만 그녀는 그중 한 마리조차 찾지 못해서 서운해한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뒤 굶주린 배를 억누르고 둘은 잠자리에 눕는다. 곧이어, 그녀는 옆집 아줌마가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멸치를 훔쳐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나는 꿈을 먹는 상상 속의 동물 트리오핀이 들어와 무슨 생각에서인지 냉동실을 열어 멸치를 먹어 치웠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그 누구도 멸치를 가져가지 않고, 멸치들이 단합하여 스스로 집을 나간 것이라고 한다. 그러자 나는 그녀의 생각에 맞장구치며 그들이 떠난 이유가 갇혀 있다는 수치심 때문이라며 아홉 멸치들의 지도자인 성범수 멸치의 연설을 인용한다. 그리고 나가 멸치들의 일대기를 이야기로 풀어헤치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도중, 그녀가 곤히 잠든 모습을 확인한다. 어느새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고, 이야기는 두 사람을 비춰주며 서서히 끝맺음을 한다.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또 하나의 소설이 생각난다. 알퐁스 도데의 '별'. 이 소설 역시 절정 즈음에 목동이 자신의 옆에서 비로 젖은 옷을 말리고 있는 소녀에게 별하늘을 보며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해 준다. 이야기가 얼마나 지났을까, 소녀는 목동의 어깨 위에 곤히 잠들고, 목동은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다고 속으로 독백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두 소설에 나온 두 사람처럼 이야기 하나만으로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하며 깊은 밤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현실적으로 저 장황한 이야기들을 대사까지 고안해내면서 말하는 것은 천재에게나 가능한 거겠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저렇게 낙천적으로 풀어헤치면서 부족함을 메꾸는 두 사람의 태도이다. 보통 현실에서 벌어진 광경이라면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치부될 만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졌으면 하는 순수한 감정이 아직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구석이 어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래, 아직은 우리가 현실만 마주하지 않고 그래도 틈새 바구니로 이런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어리숙함이 있기에, 사람다운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직은 있을 거란 확신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