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분투를 낳는 것이 아니라
분투가 희망을 낳는다”
— 벤 롤런스, ⟨지구의 마지막 숲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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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느 비 오는 12월 오른 동네 뒷산에는
떨어진 참나무 잎들이 가득한데,
자그마한 어린 나무가 때 아니게
푸른 이파리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이제 해도 짧고 날도 추운데 차암—,
싶다가 아하,
큰 나무들이 무성할 때보다 차라리
잎사귀 떨어진 지금이
어린 나무에게는 숨 쉬고 햇빛을 받을
어쩌면 최적의 시기로구나,
무릎을 치게 되는 것.
벤 롤런스의 말마따나 아마도 희망은,
“가만히 누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불활성 귀금속이 아니다...
하루하루 제작되고
재정의되어야 하는 무언가”일테니,
우리는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름의 희망을 만들어 내며.
갈라진 콘크리트 포장 사이로
줄지어 자라난 들풀처럼,
각자의 틈바구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분투(奮鬪)함으로써만 비로소 피어나는,
한 줌의, 혹은 한 방울의
희망을 위하여.
서울, 2019 | 경기, 2024
인용구를 그대로 옮기자면,
“콩고, 수단, 우간다, 소말리아의
폐허와 난민 수용소에서 내가 배운 것은
희망이 분투를 낳는 것이 아니라
분투가 희망을 낳는다는 것이다.
희망은 가만히 누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불활성 귀금속이 아니다.
달라지는 상황에 비추어 하루하루
제작되고 재정의되어야 하는 무언가다.”
(벤 롤런스, ⟨지구의 마지막 숲을 걷다⟩,
노승영 옮김, 엘리, 2023, 403~404쪽)
살아오면서 대체로 운이 좋았던,
먹을 것, 입을 것, 몸 뉘일 곳에 대한
걱정이 적었던 나로서는
그런 삶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을 모든 생명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