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육아는 늘 뒷전이다. 일이 많든 적든 출근은 해야 하니 퇴근 후 녹초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애랑 대화할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대화할 여유와 기력이 없다.
아이 봐주시는 친정 엄마랑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나랑 너무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시는데, 나는 엄마 얘기를 들어드릴 기운이 없다. 그냥 주어진 숙제를 빨리 마무리하고 선재나 보고 싶다. 지난주 엄마랑 한 5분 정도? 짧게 대화를 했는데, 약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가 유치원 체육시간에 혼자만 달리기를 안 한다는 거다.
왜? 다른 애들 다 하는데 00이만 안 한다고? 황당하고 걱정이 들었다. 매주 3번씩 체육을 하는데, 달리기를 거부하고 혼자 앉아있는 건 우리 아이뿐이라고 했다.
잠들기 전에 왜 달리기를 안 하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솔직한 답변이 나왔다(애들은 참 솔직하다). 달리기 할 때 남자애들이 쳐다보는 게 싫다는 거다. 그 심정이 너무 이해가 되면서도 일곱 살인데 벌써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회사 체육대회가 그렇게 싫었다. 몇 번 경험하지도 하지도 않았지만. 20대 때 체육관까지 빌려서 사내 체육대회하는 회사를 다닌 적 있었다. 체육관까지 갔다가 회사에서는 완전 다른 모습으로(심지어 출판사였다) 구호 외치며 깃발 흔드는 사람들을 보고 아찔해졌다. 왕꼰대 여자 상사에게 "갑자기 하혈을 한다"라고 먹힐 법한 거짓말 문자를 보내고 집으로 튀었다. 다음날 어제 계주 완전 대박, 너무 재밌었다는 사람들 후기를 들으며 뻥치고 안 가길 정말 잘했다 싶었다.
IT 회사에 다닐 때 일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회사라 더 이상의 사내 활동은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볼링장을 가자는 거다. 나는 그때까지 볼링을 한 번도 쳐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내 뒷모습을 뚫어져라 볼 것만 같은 생각에 너무 신경이 쓰였다. 내가 던진 공은 족족 도랑에 빠졌고 처음이자 마지막일 나의 볼링 스코어는 36점이었다.
남자애들이 쳐다보는 게 싫어 달리기를 안 했다는 아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얘가 날 닮아 이러나. 이럼 살기 피곤한데... 싶어서 인생의 진리를 말해줬다. "00아, 아무도 너 안 봐. 너 신경 쓰는 사람 없어."라고.
다음 날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오늘은 달리기를 했다고 했다. 유치원 선생님도 오늘 달리기 잘했다고 연락을 주셨다. 애들은 참 쉽게 개선되는구나. 나는 여전히 사내 체육대회는 못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