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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May 30. 2024

쎄한 기분은 틀리지가 않아

오후 4시가 넘었다. 오늘 회사에 와서 말을 한마디도 안 했다. 메신저로 수다 떠는 사람들은 있지만 오프라인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없다. 


철저한 고립. 이 상황을 최대한 즐기기로 했다. 편하고 좋다. 나의 일상은 언제나 가족이 중심이기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선 외롭다. 내가 바란 장르의 외로움은 아니지만 외로움은 늘 내가 갈망하는 감정과 상황이었다. 나는 혼자다. 


할 일이 없다. 어제처럼 오늘도 할 일이 없어. 혼자 점심 먹고 산책하며 혼잣말이 늘어났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자주 곱씹는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마치 한 번 본 영화를 다시 복습하듯이 그날을 떠올려본다. 


2년 전, 나는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글로벌 유니콘이 될 거라며 스타트업 뽕에 한껏 취해 있는 회사였다. 그럴싸해 보였다. 채용 페이지의 미션과 비전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내가, 나도, 저 유니콘 배에 탑승할 수 있는 거야? 


파격적인 연봉, 듣도보도 못한 스톡옵션과 성과급을 나열한 오퍼레터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만큼이나 준다고? 실감이 안 났다. 나는 그렇게 "내일은 유니콘!"을 외치는 스타트업에 합류했고 8개월 뒤 멘탈이 시멘트에 갈린 채로 퇴사했다. 하루아침에 주저앉아버린 건물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억에 남는 한 장면. 공동 대표 중 한 사람이 타운홀 리허설에서 손 터는 안무 동작처럼 손을 흔들어가며 말했다. 우리 이 프로젝트 잘 진행되면, 이대로만 실행하면 삼전이 뭐야, 구글, 아마존처럼 되는 거라고. 아마존을 추앙하다시피 했던 그 대표는 일하는 방식도 아마존의 워크룰을 고대로 베꼈었다. 


구글? 아마존? 뭔 개쌉소리지? 교회 부흥회 같은 분위기에서 묘하게 쎄한 기분을 느꼈다. 이거 뭔가 구라 같은데. 변변한 직업 없이 30대 중반을 맞이한 구구구남친이 "IT 업계에 취업할 것"이라는 대찬 포부를 말했을 때 느꼈던 불안함과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저런 놈을 왜 만나고 있니) 저 밑에서 튀어나왔다. 


이건 경험을 통해 학습된 거다. 쎄한 기분은 틀리지가 않아. 뭔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불안감과 후회. 곧 토네이도가 몰아닥칠 상황에 대한 두려움. 


망했네. 유니콘 같은 건 없었네. 당했네. 취업 사기를. 아니지, 채용 페이지와 오퍼 레터의 그럴싸함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음에도 됐고, 일단 진행시켜! 를 외친 나 자신을 원망해야지. 그때로 타임슬립을 한다고 해도, 나는 대책 없는 희망회로를 돌려가며 곧 빙하에 부딪힐 유니콘의 배에 당당히 탑승했을 거다. 


너무도 아이러니한 건, 그 사기꾼 같은 회사에서 최고의 동료들을 만났다는 거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해프닝 같았던 회사. 없는 것을 있다고 뻥을 쳐서 수많은 사람들을 벙찌게 만들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정말 귀한 인생 경험을 했다. 


문제는 그 뒤에 허겁지겁 택한 회사가 여기라는 건데. 이렇게 그림자처럼 있다가 5시에 퇴근하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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