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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Oct 14. 2019

시켜야 하는 남자, 시키기 싫은 여자

남자는 여자보다 단순하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남자의 뇌는 여자보다 덜 복잡하게 사고한다. 결혼 후 때로는 남편이 짜증 나고 때로는 부러운 이유다. 남편은 그저 배가 부르고, 땀이 날 만큼 덥지 않고, 충분한 휴식과 게임할 자유가 주어지면 만족을 느낀다.


말 걸기 힘든 순간 #게임중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작은 점이라면 남편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얇은 실선 같다. 남편은 내가 잔소리만 심하게 안 해도 결혼 생활에 별 불만이 없다(본인 입으로 말했으니 믿는다). 나는 남편이 나를 사랑스럽게 봐줄 때, 집안일과 육아를 잘해줄 때, 부부 사이에 깊은 대화가 통할 때, 남편이 나와 결혼해서 참 좋다고 할 때 행복을 느낀다.


신혼 초 남편과 집안일로 크게 다퉜다. 나는 내가 사는 공간을 '알아서' 쓸고 닦고 치우는데, 남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바닥에 먼지가 굴러다녀도, 머리카락인지 뭔지 모를 각종 체모가 눈에 띄어도, 남편은 유유자적 누워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난하나!? 날 일부러 멕이는 건가? 뭐든 부정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게 특기인 나에게 남편의 그런 태도는 <뭐지 이 남자 설마 나를 가정부로 고용한 건가 난 앞으로 평생 이 남자와 살며 집안일을 떠안아야 하는 건가> 하는 과대망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하도 졸졸 쫓아다니면서 집안일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니까, 참다못한 남편이 하루는 “누굴 ㅂㅅ으로 아나!” 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워딩만 보면 남편이 참 폭군이요 맞아도 싼 놈 같다. 하지만 나도 스킬이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나는 남편 다루기에 서툴렀다.


몇 년 살 맞대고 살아보니 남편은 정말 별 생각이 없었다. 날 멕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그냥 뇌가 단순하게 굴러가서 그런 거였다. 남자들은 누가 시켜야만 집안일을 한다는 다큐 실험 결과는 정말 맞았다. 남편에게 최초 명령어가 입력되지 않은 자발적 참여란 없었다. 남편은 1부터 100까지 디테일하게 시켜야만 움직였다!


근데 시킬 때의 뉘앙스가 참 중요하다. “당신은 게으른 돼지야!”라는 원망이 담긴 한숨과 함께 “제발 설거지 좀 해!”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과, “쟈기야~ 내가 바닥 닦을 동안 설거지 좀 해줄래요~?” 하고 마감 일정까지 은근히 포함해서 나긋나긋하게 부탁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내가 당신보다 힘이 없고, 약한 존재이며,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다. 쓰면서도 느끼지만 참 구차하다. 태생이 우직한 곰인데 이렇게 머리를 쓰고 있다니... 혼자 살면 이런 구차함은 안 느낄 텐데 결혼을 택했으니 짊어져야 하는 짐이다. 


잘 시키면 잘한다는 걸 알지만 가끔은 시키기가 정말 싫다. 정확히는 부탁하느니 그냥 내가 하지 싶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내가 하다 보면 결국 모든 일이 내 차지가 될 것을 알기에 오늘도 눈을 질끈 감고 가장 여성스럽고, 덜 공격적이며, 나긋나긋한 톤을 쥐어짜내 본다. 


여보,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정리 좀 (알아서) (내 맘에 들게) 해줄래? 아니 그보다 내가 깨우기 전에 십 분만 일찍 일어나 주면 안 될까~? 밥 먹기 전에 바닥 한 번만 쓸어주고, 애기 기저귀도 한번 봐주면 참 좋겠다.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야. (나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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